현실이 혼란스럽고 부조리할수록 이상사회에 대한 꿈은 더욱 간절해진다. 19세기 초의 프러시아도 그랬다. 당시의 독일은 서 · 남부가 '라인연방'을 결성하면서 신성로마제국에서 이탈했고 오스트리아 황제가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를 포기함으로써 수백년을 지탱해 온 게르만민족의 영광은 종말을 고했다.

프러시아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참패해 나폴레옹의 지배 아래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던 암울한 시대였다. 그 격동의 세월 속에 젊은 시절을 보낸 프러시아의 건축가 겸 화가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1781~1841) 역시 그러한 이상사회를 간절히 꿈꿨다. 물론 그는 정치가가 아니었던 만큼 정치적 변혁의 주체가 되기는 어려웠지만 그림과 건축을 통해 나름의 이상사회의 비전을 제시하고자 했다.

싱켈이 건축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16세 때 베를린에서 프리드리히 2세의 기념조형물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으면서부터였다.

그는 이듬해 건축 아카데미에 들어가 본격적인 건축수업을 쌓기 시작했고,학교 졸업 후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여행하며 그리스 · 로마의 고전주의 건축과 중세 고딕양식의 웅혼한 기상과 그 속에 깃든 조화와 통일의 원리를 체득했다.

1806년 고국에 돌아왔을 때 베를린은 프랑스의 지배 아래 있었고 그가 꿈꾸던 건축가로서의 삶은 실현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꿈의 실현은 고사하고 당장 호구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는 일단 건축 대신 그림과 무대 디자인으로 생활을 꾸려나갔다. 그 사이 그는 자신에게 화가로서의 끼도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고,화가로서의 삶이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하나의 유효한 선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나 그런 어렴풋한 희망도 1810년 9월 베를린 아카데미 전시회에 출품된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바다의 방랑자'를 본 순간 사라지고 만다.

싱켈은 자신이 이 낭만적 풍경화가의 정서적 깊이와 감성적 표현 수준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림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이때부터 그는 건축을 자기 예술의 본령으로 삼는다.

다행히 그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던 먹구름은 10년이 채 안 돼 걷히고 그의 앞에는 맑게 갠 하늘이 펼쳐졌다.

1815년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함으로써 프랑스군은 프러시아에서 물러났고,이를 계기로 싱켈은 프러시아의 새 수도인 베를린을 포함한 프러시아 전 국토의 건축 계획 책임자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를 계기로 건축을 통해 자신이 꿈꾸어 온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모든 시민이 자유롭게 토론하고 동등한 권리를 행사하는 그리스를 이상사회로 삼고 그리스인들이 이룩한 건축적 유산을 당대 건축에 접목하고자 했다. 그것은 한편으론 프랑스의 프러시아 지배 과정 속에서 싹튼 민족의식의 발현이기도 했다. 자신들을 억압한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이 로마제국의 건축물들을 그 모델로 삼은 데 대해 싱켈은 그리스 양식을 모범으로 삼음으로써 게르만의 민족적인 자존의식을 표출하려 했던 것이다.

새로운 이상도시를 건설하려던 그의 야심찬 계획은 정치적 제약과 약간은 때 이른 그의 죽음으로 인해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미완에 그치고 말았다. 그는 비록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그림과 드로잉,설계도를 통해 이상사회의 꿈을 선명히 기록해 놓았다.

그가 서른다섯의 나이로 막 프로이센의 건축책임자로 선임된 1815년에 그린 '강가의 중세 도시'만큼 그의 꿈이 선명히 기록된 그림도 드물다. 작품의 무대가 된 도시는 쾰른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도 화면의 중심에 우뚝 선 고딕양식의 대성당이 그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이 성당은 쾰른대성당처럼 정면 파사드에 고딕식의 첨두 아치가 있고 좌우에 두 개의 첨탑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주목을 끄는 것은 왼쪽의 첨탑이 미완성 상태라는 점인데,실제로 쾰른 대성당은 중세 후기인 1248년(고딕시대) 착공됐지만 1560년 이후 중단된 채 방치돼 싱켈이 이 그림을 그리던 시기에도 여전히 미완성 상태였다. 또 하나 이 성당은 쾰른 대성당이 라인 강변에 위치한 것과 마찬가지로 강변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프러시아의 건축책임자인 싱켈 자신이 쾰른대성당의 보수공사에 누구보다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이곳이 쾰른이라는 추정의 유력한 근거가 된다. 성당은 싱켈 사후 1880년 완공됐다.

그렇다면 그림 속에 구현된 싱켈의 이상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화면 왼쪽의 광경이 해답을 암시한다. 마침 왕은 무장한 근위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말을 타고 대성당으로 향하고 있는데 그 주변에는 귀족은 물론 도시민,농민 등 다양한 사회 계층이 모여 왕의 행차를 축복하고 있다. 이는 곧 종교와 정치의 통합된,다양한 계층이 차별 없이 조화를 이루는 통일 국가를 의미한다.

그런 새로운 세상을 축복이라도 하듯 하늘에 뒤덮인 먹구름은 저만치 물러가고 이제 막 왼쪽 하늘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다. 교회 위에 드리운 무지개는 이상 사회의 앞날에 서광이 비치는 것을 의미하며,강의 좌안과 우안을 연결하는 아치형의 다리는 모든 국가와 민족,계층과 계층이 적대감을 청산하고 더불어 사는 후천개벽 세상의 상징에 다름아니다.

그렇다면 싱켈이 꿈꾸던 새로운 세상은 과연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아직은 요원해 보인다. 그가 꿨던 간절한 꿈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꿈으로만 남아 있으니 말이다.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