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에 사는 중견기업 최고경영자 장모씨(58)는 올초 경기 판교신도시 내 고급 단독주택 한 채를 계약했다. 많게는 80억원까지 호가하는 최고급 주택이다. 성북동 단독주택에서 살던 추억을 잊지 못해 언젠가는 '땅을 밟고 살겠다'고 다짐하던 그였다.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해 학군 걱정이 없어지자,평소 꿈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는 "회사가 있는 강남과 거리가 멀지 않아 판교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2 서울 교대역 인근 아파트에 사는 김모씨(55) 부부는 아이들이 유학을 떠나자,교외에 단독주택을 지어 여유로운 공간을 마련하기로 했다. 단독주택을 지으면 지하 1층에 음악실을 만들어 악기 연주나 음악 감상에 푹 빠져들 생각이다. 서판교 단독택지 255㎡에 지하 1층~지상 2층 집을 지을 계획이다. 땅값과 건축비를 합쳐 12억~13억원을 예상하고 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
서울 강남의 골드 시니어(gold senior · 돈 많은 장년 · 노년세대)들이 답답한 아파트와 주상복합을 박차고 나오고 있다. 자녀가 성장해 교육 걱정이 사라진 것이 1차 계기다. 하지만 땅을 밟고,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며,건강한 노년을 보내려는 욕구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국내 부동산 시장이 실수요자 중심으로 재편되고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흐름을 보일 전망이어서 이런 움직임은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중견기업 사장 장모씨처럼 과거 단독주택에서 살아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단독주택이나 교외 타운하우스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작년 12월 평창동 첫 타운하우스에 입주한 전문직 종사자 이모씨도 마찬가지다. 평창동에서 한동안 살다가 자녀 교육과 강남 커뮤니티를 위해 논현동 아파트로 이사갔다. 녹색공간이라곤 좀체 찾아보기 힘든 논현동에서 숨이 턱턱 막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북악산이 바라보이던 옛 평창동 집이 그리워질 수밖에 없다. 아이가 대학에 진학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평창동 일대 집을 물색했고 보안과 사생활 보호에 탁월한 한 타운하우스를 계약,이사했다. 이씨는 "다들 '강남 강남' 해서 강남에 가봤지만 별 게 없더라"며 "마침 직장도 광화문 근처여서 집을 옮겼다"고 설명했다.
단독이나 타운하우스를 중심으로 한 고가 · 명품 주거단지는 이처럼 숲과 산으로 둘러싸인 자연환경이나 그에 버금가는 자연 친화적 환경이 기본이다. 아직 은퇴 전인 사람들도 있어 도심 접근성도 어느 정도 보장돼야 한다. 병원과 백화점 등 생활 인프라도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한다. 사생활 보호와 안전은 물론 주거공간이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면 금상첨화다. 강남 골드 시니어들이 원하는 노년기 주거환경과 주택은 이런 조건들을 갖춰야 '명품'으로 쳐주는 게 요즘 분위기다.
◆자산 가치보다 삶의 질 중시
고급 단독주택이나 타운하우스 관련 업계는 요즘 들어 이 같은 주택 수요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고 전한다. 작년에는 문의에 그치던 사람들이 많았는데,올 들어서는 실행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얘기다.
단독주택단지 시행사 관계자는 "작년까지만 해도 이명박 정부 3년차여서 주택 내지 부동산 시장이 어떤 방향을 잡을지 기다려보자는 사람이 많았다"며 "올 들어서는 아예 체념하고 전세나 급매로 집을 처분하고 단독주택을 짓거나 계약하려는 수요자들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도심 아파트의 자산 가치 증대에 미련을 버렸다는 설명이다.
건축사무소 버텍스디자인의 김택수 소장은 "과거엔 아파트 입면 디자인,커뮤니티센터,동 출입구 등 아파트 관련 수주를 많이 했는데 이제는 단독,타운하우스 설계에서 주로 일감을 찾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올 들어 현재까지 단독,타운하우스 설계 일감이 작년 한 해의 2배를 넘는다"고 소개했다. 단독,타운하우스 열풍은 비단 골드 시니어에게만 통하는 얘기는 아니다. 젊은 층 가운데서도 여의도 증권가에서 일찍 성공한 사람이나 전문직 맞벌이 부부들이 재테크를 떠나 AV실,텃밭,옥상정원을 일궈보려는 사람이 드문드문 보인다고 한다.
◆주택 찾는 강남부자는 누구
지난 2월 판교신도시 내 산운아펠바움 고객 설문 결과가 눈길을 끌었다. 한 채당 최고 80억원을 호가하는 고급 단독주택단지 계약자와 관심 고객 50명이 답한 내용이어서 더욱 그랬다. 이들은 주로 강남과 분당의 주상복합에 거주하는 기업가가 많았다.
연령대는 50대가 32명(64%),40대 12명(24%)으로 60대 6명(12%)보다 많았다. 직업은 기업 최고경영자(CEO)가 41명(82%)이었다. 대부분 중소기업 CEO였다. 기타 고소득 전문직 6명(12%),대기업 임원 3명 등으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50%가 주상복합에 살고 있다고 답해 관심을 더욱 모았다. 환기와 구조상 불편함,여름철 온실 효과에 따른 냉방문제,건강상 이롭지 못한 초고층 문화 등이 자연 친화적인 고급주택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