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 청년 고(故) 이천우 이등중사는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 스스로 뛰어들었습니다. 6 · 25전쟁 때 홀어머니의 눈물을 뒤로 한 채 형 고 이만우 하사가 입대한 지 불과 한 달 만이었습니다. 아우는 장렬한 죽음마저 형의 뒤를 따랐지만 60년 동안 찬 서리 비바람 속에서 홀로 남겨져야 했습니다. "

지난 6일 이명박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는 이례적으로 이 이등중사의 얘기로 시작됐다. 서울 국립현충원에 뒤늦게 함께 안장된 형제의 가슴 아픈 사연이 온 국민에게 전해졌다. 안장식이 있기까지 숨은 노력을 한 주인공은 박신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54 · 대령 · 사진)이다.

박 단장은 10일 국립현충원에서 기자와 만나 "60년이 지나서야 이 이등중사의 유해를 발굴해 이미 국립현충원에 잠들어 있던 이 하사 옆에 나란히 안장시켰을 때 가장 뿌듯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10월 강원 양구 백석산(해발 1142m) 일대에서 이 이등중사의 유해를 찾아 인식표로 신원을 확인했고 유일한 혈육인 장조카 이명덕 씨(61 · 부산 거주)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고 설명했다.

박 단장은 2005년 12월 6 · 25 전쟁 전사자유해발굴과장으로 부임했다. 2007년 1월 국방부 산하 유해발굴감식단이 출범할 때 초대 단장을 맡아 지금까지 호국의 얼을 찾는 일을 해왔다. 그가 부임한 이후 발굴해 낸 유해만 4000여구,유품은 4만5000여점에 달한다. 모두 13만여구로 추정되는 국군 유해 중 4% 정도를 발굴한 셈이다.

"150개의 유해 흔적을 찾아 흙을 파내야 유해 한 구 정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치 백사장에서 모래알을 찾는 것과 같죠.지금까지 발견된 5000여구의 유전자(DNA)를 채취한 후 유가족의 DNA와 하나하나 대조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

박 단장은 유해발굴 사업을 '10㎝의 아쉬움'이라고 표현했다. 발굴단이 흙을 파낼 때 목표보다 10㎝만 더 파는 노력을 하면 유가족의 소중한 유해를 찾아낼 수 있다는 의미다. 그는 가장 안타까웠던 일로 60년간 6 · 25전쟁에 뛰어든 외아들을 기다리다 2009년 105세에 세상을 뜬 고 김언년 할머니의 사례를 꼽았다. 김 할머니는 한 번도 이사하지 않았다고 한다. 집 대문도 바꾸지 않았다. 혹시 아들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아들을 기다리며 평생을 홀로 살아가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유해라도 찾아드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을 때 죄책감을 느낍니다. "

그는 유해발굴을 '작업'이라고 표현하면 안 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호국의 얼을 거두는 일이기 때문에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 언제나 자부심을 갖고 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전 세계에서 국가 차원에서 유해발굴을 하는 나라는 미국과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박 단장은 강조했다. 하지만 자료가 부족해 가족을 찾아 주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전사자 유해가 발굴돼 DNA검사를 하더라도 유가족을 찾을 수 없어 어려움이 많다"며 "전사자의 부모 형제 등 직계가족뿐 아니라 8촌까지 검사가 가능하니 유가족들은 가까운 보건소 등을 방문해 DNA시료를 채취해달라"고 당부했다.

김우섭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