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허공의 질감이 어떻더냐/햇살 지나고 박살나는 피투성이 천둥 지나고 할퀴듯 사나운 폭풍 하며/연한 몸빛의 달빛 지나고 연한 쑥물 봄바람 지나고/그 다음에 늘씬하게 두들겨 태어나는 한지…세상이 뱉어내는 것들 다 안아 들인/그래서 낮은 보폭으로/깊은 침묵 안에….'(신달자 '한지')

한지를 소재로 한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를 촬영하던 임권택 감독이 신달자 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지를 한마디로 뭐라고 하시렵니까. " "인간의 가장 필요한 정신 아니겠어요. 종이의 질긴 정신은 죽음을 넘어왔다고 생각합니다. " 과장이 아니다. 전통 한지를 만드는 과정은 구도(求道)에 가깝다. 1년생 닥나무 껍질을 잿물에 넣어 4~5시간 삶은 후 다시 펴 물에 띄운다. 섬유 엉킴과 변색을 막기 위해 황촉규 뿌리로 만든 풀을 섞는다. 원료와 풀이 혼합된 지통에 발을 담가 전후좌우로 흔들며 종이를 떠낸다.

마무리도 간단치 않다. 다듬이나 디딜방아로 두드려 밀도를 높이고,두께를 고르는 과정을 거친다. 속껍질이 노란 황벽나무 열매 즙으로 칠을 해 벌레와 세균,먹 번짐을 막았다. 99번이나 손이 간다고 할 정도다.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장인정신이 깃든 '작품'이다. 접었다 폈다 할 때 견디는 내절도 실험을 해봤더니 일반 복사용지는 9번 만에 끊어진 반면,전통 한지는 1000번을 넘겼다. 한지를 여러 겹 겹쳐 화살을 막기도 했다고 한다.

150년 만에 돌아온 조선왕실의궤의 색이 바래지 않은 것도 프랑스의 문화사랑 정신과 보존기술 때문만은 아니다. 조선의 고급 한지 초주지(草注紙) 덕이었다. 임금에게 올릴 글과 책,왕실 문과 창에도 발랐던 종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닥종이는 석가탑 속에서 1200년을 멀쩡하게 버텼다.

한지의 특별함을 외국도 인정하는 모양이다. 이탈리아 통일 150주년 기념으로 로마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리는 문화제(9일~8월7일)에 초청됐다. '동서양의 만남,매력과 마력의 한지'를 주제로 한 학술행사에 이어 한지 유물과 공예 · 닥종이인형 작품 전시,한지 제작 워크숍 등이 마련된다. 한국 가수들의 10,11일 파리 공연에 1만4000여명의 팬이 몰리는 등 유럽에서 K-팝 열기가 대단하다. 공연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로마 한지문화제 개최의 의미도 적지 않다. 우리 상품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가 해외에 알려져야 국격(國格)이 올라간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