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기업 A사의 신입사원 김모씨(28).그는 지난 금요일 캐주얼 데이에 옷차림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별 생각없이 대학생 때처럼 면바지에 라운드티를 입고 회사에 나왔다가 팀장에게 혼쭐이 난 것."단추없는 옷,그게 어디 옷이야? 회사가 무슨 놀이터야? 당장 가서 갈아입고 와!" 경기도 일산에 살면서 서울시청 부근의 직장에 다니는 그가 집까지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올 수는 없었다. 김씨는 결국 점심시간을 이용해 인근 백화점에서 '생돈'을 내가며 남방을 사 입고 와야 했다. 물론 그가 고른 옷은 가장 '점잖은' 스타일이었다.

비즈니스 캐주얼이 확산되면서 직장인들의 옷차림도 다양해지고 있다. 특히 여름철에는 에너지 절약 차원에서 노타이 등 편한 옷차림을 권장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하지만 복장이 아무리 자유로워지더라도 조직 내에 '드레스 코드(dress code)'는 여전히 남아 있는 법.김과장 이대리들을 종종 곤궁에 빠뜨리는 직장 내 복장 문화를 살펴본다.

◆꽃무늬 원피스 한번 입었다가…

철강업체에 근무하는 정모씨(27 · 여)는 대학에 다닐 때부터 '패셔니스타'로 이름을 날렸다. 입사한 지 몇 달이 지나 이제 회사 생활에 적응해 가고 있다는 자신감이 싹틀 무렵,입사 이후 줄기차게 정장만 입어오던 그는 화려한 꽃무늬가 프린트된 원피스에 분홍색 카디건으로 한껏 포인트를 줬다. 주위에선 젊고 예쁜 신입사원의 풋풋함이 느껴진다며 칭찬 일색이었다. 그런데 점심을 먹고 난 후 나이 지긋한 옆부서 팀장이 그를 불러 굵고 낮은 톤의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회사에 꽃놀이 나왔나. 앞으로는 좀 깔끔하게 입고 다니게…." 그 팀장의 한마디 이후 정씨의 복장은 무채색 계열로 회귀했다.

복장에 대한 상사들의 '태클'이 심심찮게 일어나자 눈치빠른 김과장 이대리들은 신입사원들을 '마루타'로 활용하기도 한다. 유통업체 B사의 최 대리는 "우리 회사도 얼마 전부터 금요일을 '캐주얼 데이'로 정했는데,복장의 수준이 어느 정도냐가 큰 관심사"라며 "일단 신입 후배들에게 최대한 자유롭게 입고 오라고 시켜놓고는 팀장의 반응을 봐가며 수준을 가늠하고 있다"고 전했다.

◆'당황 복장'참아 줬으면…

상사들도 할 말은 있다. 편한 옷차림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예의는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전자업체 C사의 이모 부장은 여성 신입사원들을 대할 때 시선처리에 애를 먹는 경우가 자주 있다. 가슴 위쪽까지 드러나는 타이트한 V넥에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스키니진이 그가 지적하는 대표적인 '당황 복장'이다. 이 부장은 "그 여성 사원이 내 옆에서 업무 지시를 받으면서 서류를 보기 위해 가슴을 숙일 때면 솔직히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무척 당황스럽다"고 털어놨다.

식품업체 C사의 박 과장은 계단을 오르내릴 때 이따금씩 수치감이 밀려 오는 것을 속일 수 없다.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다니는 5층짜리 낡은 사옥에 근무하는 그는 미니 스커트를 입은 여직원이 결재 파일 등으로 치마 뒤를 가리면서 앞서 계단을 오르면 고개를 푹 숙인 채 뒤를 따른다. "이런 상황에서 뒤에 오는 남자들은 '치한'이 된 느낌입니다. 아마 여자들은 그런 심리 상태를 모르는 것 같아요. 그럴 거면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지 말든지…."

◆정장도 색깔 나름

젊은 직장인들은 상사들이 복장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하는 데 대해 고리타분하다고 푸념한다. 무역회사에 다니는 문모 대리(32)는 "업무만 잘하면 되지 왜 이리 복장에 대해 사사건건 간섭하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실제로 신입사원들은 직장에 첫 발을 들이면서 정장을 사는 게 적지 않은 스트레스다. 학생 때 늘 스키니진에 라운드 티,후드티,민소매 등을 입다가 한 벌에 수십만원에 달하는 정장을 사려니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광고회사 신입사원인 임모씨는 비싼 정장을 한꺼번에 연달아 두 벌 구입한 경험이 있다. 첫 출근 때 은갈치색 정장을 입고 왼쪽 주머니에 스카프까지 반으로 접은 '꽃단장'모드로 출근했다. 임씨의 스타일에 대한 선배들의 반응."네가 무슨 레스토랑 웨이터냐." 임씨는 그날 퇴근길에 바로 백화점으로 달려가 검은색 양복 한 벌을 추가로 샀다.

◆의전은 역시 까다로워

한 대형 전자업체에 근무하는 신모 과장은 중국법인에서 몇 년 동안 근무하다가 영업팀으로 최근 복귀했다. 그는 올봄 회사에서 마련한 고객초청 야유회의 진행관리 업무를 맡게 됐다. 야유회 컨셉트에 맞춰 하늘색 바지와 노란색 폴로티,선글라스로 한껏 멋을 부리고 왔다. 다른 동료들의 복장을 본 순간 그는 속으로 '아뿔싸'를 외쳤다. 다른 진행 요원들은 한결같이 검은 양복 정장을 입은 채 고객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는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가 양복으로 갈아 입고 아내가 운전하는 차량에 몸을 싣고서야 가까스로 야유회 버스 출발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고객초청 행사라 할지라도 직원들이 지켜야 할 드레스코드가 있었는데 깜빡했네요. "

기업 오너나 최고경영자(CEO) 등 VIP를 수행하는 비서들에겐 보다 엄격한 드레스 코드가 요구된다. 수행 비서들이 가장 싫어하는 계절은 겨울이다. VIP가 호텔이 아닌 대중 음식점 등에서 식사할 때면 혹한의 날씨 속에서도 식당 밖에서 그의 동선을 파악하며 장시간 대기해야 한다. 수행 비서들은 찬바람에 손을 호호 불고,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윗분'에 대한 예의상 절대 외투를 입고 있지 않는다.

한 대기업에서 VIP 의전 업무를 맡고 있는 윤모 과장은 "비서는 아무리 덥고 추워도 1년 365일 정장 슈트로 수행하고 대기하는 게 원칙"이라고 전했다.

강경민/노경목/조재희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