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9일.미국의 힘과 산업을 상징하던 빌딩 하나가 외부인의 손에 넘어갔다. 크라이슬러 빌딩이 외국 정부에 8억달러에 팔린 것.그 외부인은 영국도,독일도,프랑스도,서구의 그 어떤 경제대국도 아니었다. 빌딩 구매자는 오늘날 과거 500년 이상 계속된 서구의 경제적 지배를 위협하며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파워 국가군인 아부다비 정부의 투자기구였다. 그러나 크라이슬러 빌딩은 2008년 상반기에 중동 투자자가 사들인 미국의 상업용 부동산 약 18억달러의 일부일 뿐이었다.

《미국이 파산하는 날》은 경제적으로 가장 강력한 국가들이 어떻게 그들의 막대한 부와 지배적인 정치적 지위를 잃어버렸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뽑힌 저자 담비사 모요는 세계 최빈국 아프리카 잠비아에서 태어나 극도의 가난과 절망을 체험한 거시경제학자다. 학생 5명당 책상이 2개밖에 없는 교실에서 공부하면서도 미국과 영국의 가장 인기 있는 TV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꿈을 키워온 그는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MBA를 마친 후 하버드대 케네디정부정책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옥스퍼드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차이메리카의 개념을 처음 정립한 니얼 퍼거슨의 제자로 세계은행과 골드만삭스에서 10여년간 일하며 실력을 인정받은 차세대 정통 경제학자다.

그는 "글로벌 금융위기는 고립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장대한 역사의 물줄기가 방향을 트는 과정에서 나온 뚜렷한 징후"라고 말한다. 이어 "세계경제의 중심축이 서구에서 신흥세계로 이동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하며 과거 서구 지배의 역사에서 시작해 최근 서구 몰락의 과정을 더듬는 순서로 이야기를 펼친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엄청난 부를 쌓고 세계 경제를 지배하게 된 미국이 자본 노동 기술 등 세 가지 요인으로 경기 침체와 금융위기를 맞았다고 풀이한다. 정부가 낮은 금리로 대출을 장려해 왜곡된 자본이 주택시장에 몰렸고,주택시장은 투기시장으로 전락해 경제 몰락의 주범이 됐다는 것.또 부채 보유자가 주식 보유자의 무분별한 위험 추구 행위를 관리하지 못해 장기적인 경제위기를 일으켰다고 분석한다.

노동의 배분에 실패한 부분에 대해서는 "미국 정부가 연금 지급을 미루고 부담을 높여 부실 재정의 규모를 키우고,서비스 부문에 유리하게 인력을 이동시켜 인력 불균형 현상을 낳았으며 엄격한 법령으로 글로벌 인재집단의 사회 진입을 막아 국가적 손실을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여기에 기술에 대한 교만함이 더해져 독점 기술을 신흥국에 빼앗기는 등 자본 노동 기술의 세 축이 연쇄적으로 지금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분석한다.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은 여전히 애매한 위치에 서 있다. 서구 선진국에 포함되지 않으면서 막연히 신흥국의 일원으로 간주될 뿐,신흥세력을 대변하는 브릭스(BRICs)에도 끼지 못한다. 지난 4월 중국에서 열린 브릭스(BRICS) 정상회의에도 남아공이 초청받고 한국은 초대받지 못했다. 선진국이 실패했다는 대목이 한국이 직면하는 문제들과 닮았다는 점에서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 많다. 부채를 통한 자산 증식과 무리한 내집 마련 정책,퍼주기식 복지정책,저출산과 고령화,무분별한 에너지 과소비 등 서구의 몰락을 불러온 원인들이 오늘날 한국이 직면하고 있는 정치적 결단의 대상들과 똑같다.

모요가 주장하는 미국과 서구 열강의 생존 과제는 '사고방식의 변화'다. 미국은 더 이상 신흥세력을 위협적인 불청객으로 여기지 말고 무역상대국으로 관계를 개선하는 한편,무계획적인 소비보다 저축을 장려하고 세금 체계를 개편하라는 것.즉 경제 성장의 3대 핵심 요소인 자본 노동 기술을 개선해 스스로 경제활동을 재정비하라고 꼬집는다.

이 책의 원제는 《어떻게 서구는 길을 잃었는가(How The West Was Lost)》다. 서구의 몰락과 신흥국의 부상을 기본 골격으로 삼고 있지만 서구가 완전히 쇠락했다는 결론을 내지는 않는다. 표면상으로 글로벌 경제 축의 이동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지만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고,역전의 기회도 남아 있다고 본다. 다만 정말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서둘러 개혁에 나서야 한다는 강력한 충고를 남긴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