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주의가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다. 길거리 함성을 여론으로 착각하고,분별없는 욕구 분출을 민주주의로 포장하고 있다. 광장의 확성기는 갈수록 볼륨을 높이고 집단의 이기주의는 판을 치고 있다. 국민을 국가에 구걸하는 존재로 만들고 관료들은 그 국민의 등을 쳐 사적 이익을 도모하는 낡은 봉건관료로 돌아가고 있다. 권리가 있으되 의무를 외면하고,자유가 있으되 책임은 사라졌다. 정치는 표의 노예가 돼 공당(公黨)의 대표들마저 길거리 연좌 농성에 가담하며 대의민주주의를 스스로 부정하는 판이다. 대중민주주의가 구조화하는 형국이다. 급기야는 포퓰리즘을 경쟁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민주주의 성숙은커녕 일탈이요 퇴보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상징되는 '87년 체제'는 형해화된 민주주의를 깨고 실질적인 민주주의로 가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진전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87년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은 역설적으로 그 정신이 화석화하고 있다는 불편한 증거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가꾸고 발전시키는 데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 민주화를 이뤘을 때보다 더 후진적이 되어 간다는 최장집 고려대 교수의 지적이 전혀 틀리지 않다. 과연 한국과 한국인은 성숙한 서구형 민주주의를 담보할 능력이 없는 것인가.

이명박 정부가 520만표의 압도적 표차로 출범한 것은 폭주하는 산업화와 열정의 민주화를 거쳐 이제는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자는 국민들의 염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대선 결과 자체를 부정하려는 정치세력이 광우병을 빌미로 광장을 장악하면서 불행히도 시대적 소명은 초반부터 실종되고 말았다. 정부 스스로도 법과 원칙을 버리고 실용과 기회주의의 깃발을 내걸면서 길거리 민주주의를 정당화하고 말았다. 개인의 이익과 국가 이익이 다르고,그 전제 아래 합의를 도출해가는 것이 정당을 통한 정치과정이자 대의민주주의의 본질이다. 그러나 정당들은 국민의 갈등을 부추기고,투표권 있는 자와 투표권 없는 자의 처지를 달리 대접하면서 스스로 국가의 보편적 이익에 등을 돌렸다. 여야를 막론하고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그 무수한 반값,무상의 청구서는 나중에 누가 지불할 것인가.

민주주의는 집단지성을 기반으로 하는 차선의 정치질서다. 그러나 집단지성은 광장에 모인 대중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히틀러는 한 사람을 속이긴 어려워도 대중을 속이는 것은 쉽다고 했다. 광장의 의견이 모아졌다고 집단지성이 될 수는 없다. 집단지성은 개개인이 주어진 아젠다를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때,다시 말해 나만의 공간에서 비밀투표를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다. 유럽에서 북유럽과 남유럽이 달라진 것도,서구와 동구가 길을 달리한 것도 바로 이런 차이에서 비롯됐다. 최근 남유럽의 몰락은 민중주의 혹은 직접 · 참여정치가 몰고온 포퓰리즘의 종착역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거리의 확성기가 아젠다를 장악하는 사회라면 남유럽식으로 갈 수밖에 없다. 반면 북유럽은 개인주의에 입각한 중산층의 형성을 토대로 성숙한 민주주의를 이뤄냈다. 두터운 중산층과 그들의 자각된 개인주의에 기반하지 않고 대중민주주의로 성공한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

한국 민주주의는 어디로 갈 것인가. 한국은 지금 소득 2만달러의 덫에 빠진 것이 아니라 소위 직접 민주주의 과잉이란 수렁에 빠져 있다. 큰소리를 내야 관철된다는 악순환을 정당화하는 정치는 그 자체로 반민주적이다. 누가 한국의 민주주의를 구제할 것인가. 내년에는 총선과 대선이 동시에 치러진다. 한국은 다시 3류국가로 전락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