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하구에 자리잡은 장항에 들어서면 세월이 멈춘 듯하다. 바닷가 수산물공판장,정겨운 기찻길,낮은 지붕과 한적한 시내 풍경 등 수십년 동안 변한 게 거의 없다. 일제시대 때 읍으로 승격했지만 70년이 넘도록 여전히 읍이다. 이곳에 자리잡은 우양냉동식품(대표 이구열 · 54)은 이런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급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일로 퓨레와 페이스트 핫도그 등을 만들어 급속 냉동시킨 뒤 식품업체에 공급하는 이 회사는 매년 20% 안팎 매출이 늘고 있다. 이 여세를 몰아 일본 동남아 등으로 수출도 추진하고 있다.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2005년 늦봄.이구열 우양냉동식품 대표는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딸기 때문이었다. 국산 딸기를 가공해 퓨레(puree · 과실을 분쇄해 체로 걸러낸 것.과육 음료의 원료로 쓰임)로 만들어 대기업에 납품하기로 했는데 작황이 좋지 않아 원하는 물량을 확보할 수 없었다. 일반 공산품은 주문하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공장에서 밤새 찍어내면 된다. 하지만 농산물은 그렇지 않다.

며칠간 밤잠을 못자며 고민하던 그는 깜짝 놀랐다. 자기 손에 머리카락이 한줌 쥐어져 있는 게 아닌가. 국산 딸기가 부족하면 수입산으로 대체할 수도 있었다. 퓨레를 만들어 냉동시키면 국산인지 수입산이지 분간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양심상 그럴 수는 없었다. '신뢰'가 그의 가장 중요한 경영철학이기 때문이다. 결국 전국을 다니며 웃돈을 주고 딸기를 구매해 공급했다. 손해를 감수한 것은 물론이다.

우양냉동식품은 과일 및 농산물을 가공하는 식품 소재 전문기업이다. 딸기 배 등으로 퓨레나 페이스트 잼을 만들어 냉동 포장한 뒤 공급한다. 밤,고구마 통조림이나 핫도그 등을 만들어 납품하기도 한다. 공장은 장항 군산 나주 등에 모두 6개를 두고 있다. 매출은 2009년 368억원에서 작년엔 463억원으로 뛰었고 올해는 550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정도면 식품원료 가공업체로는 3위 안에 드는 것이다. 성장가도를 달리는 배경은 바이어와 쌓은 돈독한 신뢰,다양한 제품 개발,공격적인 투자가 밑바탕이다.

이구열 대표가 이 분야에 뛰어든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고려대 화학과를 나와 미국 하트퍼드대에서 보험학 석사(MSI)와 서강대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취득한 그는 제일화재 본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어느날 그에게 부산에 계신 아버지(이동규 회장 · 83)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장항에 있는 냉동창고를 경매를 통해 인수했는데 한번 경영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보험과 냉동창고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지만 당장 그것을 운영할 사람도 없는 터여서 "예"라고 답하고 장항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암담했다. 직원 7명으로 냉동창고를 운영했지만 이 사업만으로는 도저히 수지를 맞출 수 없었다. 창고를 인수하기 위해 낸 빚을 갚을 길도 없었다. 이때가 1992년 1월.그의 나이 35세였다.

어떻게 수익을 올릴까 고민하던 차에 모대기업으로부터 제안이 들어왔다. "고구마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데 증숙(쪄서 익히는 것)사업을 해볼 생각이 없느냐"는 연락이었다. 다각화를 궁리하던 터에 이처럼 좋은 제안은 없었다. 이듬해 식품제조허가를 얻고 라인을 깔았다. 1996년에는 배퓨레 수요가 급증하자 또 다른 기업으로부터 배퓨레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과일 퓨레사업에 나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대기업으로부터 요청을 받아 통조림과 핫도그 생산라인을 깔았다.

단지 대기업이 원하는 제품만 공급한 것은 아니었다. 자체 연구소를 만들어 8명의 연구원을 둔 뒤 새 제품 개발에 나섰다.

연구소에는 박사 학위자도 있다. 2005년에는 보늬밤 제조공정에 관한 특허도 얻었다. 밤에는 겉껍질과 속껍질이 있는데 보늬밤은 속껍질을 살린 밤이다. 식품 생산라인을 표준화하기 위해 ISO 9001과 14001을 획득했다.

이 대표는 "2007년에는 동종업계 최초로 핫도그 생산라인에 대해 식약청으로부터 HACCP(위해요소 중점관리 기준 · Hazard Analysis and Critical Control Point )인증도 받았다"고 밝혔다. 이 라인에 들어서려면 방진복과 방진모자를 착용한 뒤 에어샤워와 손씻기 등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반도체 공장에 들어서기 위한 과정과 비슷하다. 위생적인 공간에서 소시지에 밀가루 반죽을 고르게 입혀 나무막대기를 끼운 뒤 구워서 급속 냉동시킨다. 육안검사와 금속탐지기 X레이투시기 검사를 거친 뒤 출고한다. 이 대표는 "경영자로서는 좋은 품질의 제품을 좀 더 저렴하게 생산하는 게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위생"이라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3가지 목표를 갖고 있다. 첫째 수출에 적극 나서는 것이다. 그동안 내수에 주력해 왔으나 요즘 수출로 눈을 돌리고 있다. 무역협회 대전지역본부 한기호 본부장과 무역협회 산하 종합무역컨설팅지원단(Trade SOS) 소속 신윤식 상임자문위원,한남내 글로벌무역전문가양성과정(GTEP) 단장인 최장우 교수 등의 지원을 받고 있다. 이 대표는 "중소기업은 무역 전문인력이 부족한데 이 분들이 지원해줘 일본과 동남아 호주 뉴질랜드 시장 개척에 나서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연간 수출액은 아직은 10억원 선으로 적지만 앞으로 크게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이 대표는 "일본의 경우 지난 3월 대지진 이후 식품원료를 공급해줄 수 있느냐는 문의가 줄을 잇고 있다"고 말했다.

SK그룹 출신의 신윤식 자문위원은 "수시로 방문하거나 온라인을 통해 해외 진출을 지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지난 5월 방콕국제식품전시회에 핫도그를 출품한 뒤 한남대 학생들의 지원으로 상담을 벌여 많은 바이어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현지의 유력 식품회사와 수출 양해각서도 맺었다"고 덧붙였다.

둘째,식품원료 전문업체로서 돈독한 위상을 세우는 것이다. 이대표는 "일본의 대표적인 식품원료업체인 쇼웨이의 경우 연간 매출이 1조원에 이를 뿐 아니라 그 이름 자체가 신뢰의 상징"이라며 "이 회사를 모델로 삼고 있다"고 설명했다.

셋째,원료를 직접 재배하는 농장을 운영할 생각이다. 이 대표는 "우선 고구마 농장을 만들어볼 생각"이라고 밝혔다. 그는 "그냥 삶아서 먹는 고구마는 소비자들이 작고 가는 것을 선호하지만 식품가공업체로서는 다양한 성분을 지닌 크고 품질 좋은 고구마를 길러낼 필요가 있다"며 "이를 위해 직접 재배해볼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컴퓨터에 들어가는 중앙처리장치(CPU)의 대명사는 인텔이다. 'Intel Inside'는 컴퓨터의 신뢰도를 높여준다. 이처럼 '우양 인사이드(Wooyang Inside)'를 국내외 바이어들에게 신뢰받는 식품원료 브랜드로 만들어 보겠다는 이 대표의 꿈이 이뤄질지 관심을 모은다.

장항(충남)=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