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 우의정을 지낸 류관은 울타리조차 없는 낡은 초가집서 살았다. 나라에서 받은 녹은 대부분 마을에 다리를 놓거나 길을 넓히는 데 썼다. 임금이 어찬을 내리면 마을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벌였고 귀한 하사품도 모두 나눠주었다. 장마철 비가 새자 우산을 펴들고 부인에게 "우리는 우산이라도 있지만 이마저 없는 백성들은 어떻게 비를 피할까"라고 했다고 '필원잡기'에 전한다. 서울 창신동 그가 살던 집이 우산각으로 불렸을 정도다. 그야말로 청백리(淸白吏)의 표상이다.

조선 영조 때 호조 서리였던 김수팽이 선혜청 아전으로 일하던 동생 김석팽의 집에 들렀을 때다. 마당에 놓여 있는 염료 항아리들을 보고 까닭을 물었다. 동생은 살기가 어려워 아내가 염색으로 살림을 돕고 있다고 했다. 김수팽은 크게 화를 내며 염료를 모두 쏟아버리고 동생을 꾸짖었다. "나라의 녹을 받는 관리로 이런 장사를 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가난한 백성들은 무엇을 해서 먹고 살란 말이냐."

어느날 김수팽이 곳간의 물품을 정리하던 중 한 대신이 들어와 딸에게 노리개를 만들어줘야겠다면서 은 바둑알을 몇 개 집어들었다. 김수팽도 한 움큼 집으며 "저는 딸이 다섯이나 되니까 더 많이 가져가야 되겠습니다"고 하자 대신은 무안해서 바둑알을 내려놓았다고 한다. 말단 관리였지만 서릿발 같은 기개와 품위를 지켰던 것이다.

작년에 금품수수로 파면 해임 등 중징계를 받은 공무원이 624명으로 2006년에 비해 5.5배나 증가했다. 공금 횡령과 유용 등 다른 비리로 징계받은 경우까지 합하면 5818명이나 된다. 중앙부처의 향응성 연찬회가 관행적으로 이뤄지는가 하면 공사 감독 과정에서 룸살롱 외상값을 시공업체에 떠넘긴 몰염치 공무원까지 있는 판이다. 청와대 총리실 행정안전부 등이 나서 부패척결을 천명했지만 얼마나 효과를 거둘지는 알 수 없다. 비대한 정부와 자의적 행정,촘촘한 규제들이 구조적으로 부패를 조장하는 상황에서 감찰에만 기대기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에 열 사람이 한 명의 도둑을 못 지킨다고 했다. 기본은 결국 공직자들의 마음가짐이다. 혹 '부정의 유혹'으로 마음이 기울거든 류관의 유훈을 기억할 일이다. '우리 집안에 길이 전할 것은 오직 청백이니,대대로 끝없이 이어지리라(吾家長物唯淸白 世世相傳無限人).'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