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한국에 오기 전 싱가포르에서 최고재무책임자로 일했다. 당시 재무 부서는 매우 똑똑하고 유능하면서도 진지하고 조용한 싱가포르 여성 회계사들로 이뤄져 있었다. 평소 차분한 그들도 한창 인기 있는 한국인 영화배우,탤런트 또는 가수 얘기만 나오면 눈을 반짝이며 중국어로 시끄럽게 수다를 떨곤 했다. 한국으로 옮겨간다는 계획을 전했을 때는 그들로부터 시샘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아시아에서 한류 열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유럽을 강타한 한류 열풍은 얼마 전만 해도 크게 신경쓰지 않던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궁금증을 품고 그 문화를 사랑하는 새로운 세대의 유럽인들을 탄생시켰다. 한국의 영향력이 세계 곳곳으로 뻗어 나감에 따라 예전에는 해외에서 접하기 어려운 한국 문화의 진한 향과 깊은 멋을 이제는 더 많은 세계인들이 경험할 수 있게 됐다. 특히 한류의 대표주자인 K팝은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는 유럽인들에게 건전한 재미와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동시에 한국과 한국 가요 문화를 바라보는 세계인에게 밝고 세련된 이미지를 심어주고 있다.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걸 보면서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현대 문화의 속성이 무엇인지,그리고 평범한 생활에 안주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현상이 전하는 교훈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오천년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더불어 오늘날 세계적인 산업 경쟁력을 인정받는 한국이지만 가장 잘 알려진 글로벌 아이콘을 떠올려 보면 글로벌 기업인보다는 축구선수 박지성이 연상된다. 왜 그럴까.

싱글맘으로 홀로 자녀를 키우는 무명 작가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쓴 '해리포터'는 단숨에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으며 지난 10년간 308조원의 매출을 올렸다. 한국의 반도체 수출 총액 231조원과 비교해 보면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첨단 부품의 매출을 소설 속의 마법사가 앞지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혁신,창의력,그리고 꿈.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한 가치들이다. 세계인들이 한류에 열광하는 건 재미있고 참신하고 색다르기 때문이다. 해리포터를 사랑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박지성에게 열광하는 것도 바로 그가 축구 그라운드의 살아있는 마술사여서다.

한국의 교육열은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제는 한국 학생들이 강의실 밖에서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고 창의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스마트' 세상에서는 꿈과 영웅,그리고 영감이 필요하다. 한류와 K팝의 인기가 우연이 아닌 것은 그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창의력과 상업적인 성공 간에는 긴밀한 상관관계가 존재해 왔다. 글로벌 경제의 중심이 아시아로 이동 중인 세기적 전환기다. 다양한 문화 트렌드와 세계인의 여론을 이끌어갈 수 있는 창의성을 기를 환경 조성에 눈돌려 글로벌 문화의 허브를 꿈꾸는 건 어떨까.

리차드 힐 < SC제일은행장 Richard.Hill@sc.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