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향인 남원은 볼거리뿐만 아니라 '들을거리'까지 있는 매력적인 곳이다. 코스를 안내하는 표지판 한편의 글씨가 정감 넘친다. "내 소리 받아 가시오!" 그래서 걷는 길이 더 흥미롭고 덜 힘들다.

잠깐씩 숲속 오솔길에서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긴 했지만 4~5시간을 걷는 것은 분명 모두에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의지할 수 있는 동료가 있고,가족이 있으니 낙오자는 없다. 첫날 목적지에 이를 즈음 아이들의 표정엔 다소 힘든 기색이 보이지만 참여하는 횟수가 쌓일수록 인내심도 커지고 체력 또한 몰라보게 좋아지는 것 같다고 입을 모은다.

첫째 날 야영지인 흥부골자연휴양림에 도착하자 아이들은 계곡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간다. 아빠들은 각자 가족을 위해 알록달록 형형색색의 앙증맞은 텐트들로 숲속의 작은 '백패커들의 마을'을 뚝딱 짓는다. 백패킹용 텐트는 작다. 정말 필요한 공간 외에는 싹둑 잘라버린 것처럼 아주 작다. 그러나 그 작은 공간에서 어깨를 맞대고 누운 가족들과의 추억은 그 어떤 것보다 크고 소중하다.

작은 집을 지은 다음엔 소박한 밥도 짓는다. 숲속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앙증맞은 코펠의 밥내음이 오늘따라 더욱 구수하게 다가온다. 백패커들의 식사는 단출하다. 하지만 하루의 피로와 허기를 달래는 데는 값비싼 산해진미가 필요치 않다. 각자 가져온 소박한 밥과 단출한 찬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산해진미가 되었으니….꼭 필요한 정도만 가져와서 필요한 정도만 먹는 것이 백패킹 여행의 요령이자 인생의 지혜다.

다음날 아침,휴양림을 떠나 3코스에 접어든다. 원래의 둘레길 3코스는 이곳부터 금계마을까지인데 오늘의 목적지는 산내마을로 정한다. 산내마을은 지리산의 명소인 뱀사골이 시작되며 풍광 좋은 야영지와 숙박단지가 있는 곳이어서다. 전날의 평지형 코스와 달리 3코스는 오르막이 제법 많은 중급 난도 이상의 길이다.

맨몸으로 걷기에도 만만치 않은 산길을 20㎏ 안팎의 배낭을 메고 가기가 쉽지는 않지만 살면서 때론 이보다 더한 삶의 무게를 느낄 때도 많지 않은가. 백패커들도 오르막이 나오면 힘겨워 하고 내리막이 나오면 수월함을 느끼며 인생을 배운다.

둘레길 곳곳엔 여행자들의 쉼터인 정자나 평상 등이 있다. 땀에 흠뻑 젖었던 몸이 시원한 산골 바람에 마르면서 처졌던 몸은 이내 재충전을 한다. 하찮은 과자 반쪽도 이 순간엔 함께 나누며 서로 고마움을 전하게 한다.

숲길을 걸으며 어느새 형,아우가 돼 서로를 헤아리고 배려하며 소박한 우정을 나누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멋스럽다. 어디선가 '멋'이란 단어의 속뜻이 '필요 이상의 그 무엇'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백패킹 여행자들이야말로 '참 멋'을 아는 이들이 아닐까.

봄을 어물쩡 건너뛰고 여름이 성큼 달려온 탓에 낮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는 산길을 걷는 이들의 몸은 이내 온통 땀에 젖는다. 지쳤던 몸이 산중의 얼음짱 같은 계곡물에 닿자 쌓였던 젖산을 토해내며 피로는 어느새 사라진다. 아이들은 소리치며 어울려 노느라 여념이 없다. 시설 좋은 워터파크에 데려간 것보다 더 즐겁고 신이 났다. 옷이 흠뻑 젖도록 첨벙대며 노는 그 힘은 어디서 솟았는지….

아쉬움 속에 숲속 물장난을 끝내고 다시 길을 나선다. 3코스의 막바지에 이르자 저마다 조금씩 지쳐 보이지만 서로를 격려하며 밀어주고 당겨주는 모습에서 잔잔한 감동이 전해온다.

둘째 날 야영지는 아이들이 물놀이 하기에 좋고 풍광도 좋은 뱀사골 근처다. 아이들은 날이 어둡도록 신나게 논다.

어른들도 동심으로 돌아가 물놀이에 동참한다. 아이들이 계곡에서 첨벙대느라 여념이 없는 동안 밥을 짓는데 빙그레 웃음과 함께 행복감이 밀려온다.

백패킹 여행의 휴식은 소박하다. 먹을거리 가득한 술자리 대신 각자의 소중한 시간을 나름대로 갖는다. 한쪽에서 소박한 안주에 술 한 잔 기울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 시간은 길지도 않고 길 수도 없다. 안주거리도 마땅찮고 무거운 술도 거의 안 가져 오기 때문이다. 아빠를 따라 나선 '꼬맹이 백패커'는 도심의 값비싼 레스토랑에서 풀코스 요리를 먹었던 기억보다 소박하지만 자신에게 집중해 주는 텐트 앞 만찬을 훨씬 오래 기억할 것이다. 반짝이는 별과 함께 야영지의 밤이 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