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는 새로운 다리다. " 이 말은 맞을까 틀릴까. 혹자는 무슨 뚱딴지 같은 얘기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건 신소리가 아니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는 '퐁뇌프'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어로 '퐁(pont)'은 다리라는 뜻이고 '뇌프(neuf)'는 새로운이라는 뜻이니까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는 새로운 다리다"라는 말은 맞다.

'뇌프'는 아라비아 숫자로 아홉을 의미하기도 해서 가끔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1991년 개봉된 레오 카락스 감독의 '퐁뇌프의 연인들'이라는 프랑스 영화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DVD로 출시됐는데 배급회사가 영화 제목을 '제9교의 연인들'로 오역해 영화팬들을 포복절도하게 만들었다.

퐁뇌프는 센강 우안(지도상의 북쪽)과 좌안을 연결하는 파리에서 세 번째로 긴 다리로 앙리3세 치세기인 1578년에 첫삽을 떴다. 부근의 노트르담 다리만으로는 늘어나는 교통량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새 다리를 만들 생각을 한 사람은 앙리2세였는데 비용 문제로 주판만 튕기다 세상을 떠났고 결국 셋째 아들인 앙리3세가 바통을 이어받아 삽질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엔 신교와 구교 사이에 종교내란이 불거져 공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새로이 부르봉 왕조를 연 앙리4세(재위 1572~1589)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새로운 다리'는 파리의 대동맥으로 중책을 수행하게 된다.

퐁뇌프의 중요성은 이 다리가 파리의 종교와 행정 중심인 시테섬의 왼쪽 끝단을 남북으로 가로지른다는 점이다. 강의 남북을 연결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의 심장부와도 연결된다는 점에서 각별한 것이다. 게다가 당시의 다리들이 통로의 양쪽 가장자리에 집을 짓는 게 일반적이었던 데 비해 퐁뇌프는 최초의 도로 전용 다리였다.

이것은 백성의 통행과 보행의 편리성을 배려해서 취해진 조치가 아니라 "다리 위에 집을 지을 경우 루브르궁의 시야를 방해한다"는 앙리4세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였다. 다리의 교각 위에는 노점상들이 좌판을 깔고 장사할 수 있게끔 반원형의 돌출공간이 만들어졌다.

이런 교통 요지로서의 중요성과 다리의 새로운 구조로 인해 퐁뇌프는 단숨에 파리시민의 명소로 자리잡는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으레 장사꾼과 협잡꾼의 텃밭이 되게 마련이다. 17세기에 들어서면 다리 좌우의 인도에는 좌판을 깐 상인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서 행인들의 소매를 끌어당겼고 여기에 엉터리 약장수,돌팔이 의사,야바위꾼들까지 끼어들어 호객하는 등 하루 종일 북새통을 이뤘다. 곡예사,만담꾼들도 이곳에서 자신의 장기를 뽐낸 후 동전 한 잎을 구했고,거리의 여인들 역시 이곳을 영업장소로 활용했다.

18세기에는 이곳에서 아프리카 노예가 공공연히 거래돼 악명을 떨치기도 했지만 여전히 이곳은 파리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소의 지위를 견고하게 유지했다. 퐁뇌프의 영광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였다. 파리 시가지가 확장되고 새롭게 정비되면서 퐁뇌프 말고도 시민들의 눈과 마음을 현혹하는 공간들이 도처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탓이었다.

그렇지만 퐁뇌프는 19세기 말까지도 여전히 수도의 교통 요지로 사람들의 통행이 끊이지 않았고 인기있는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서민의 삶에 관심이 많은 화가들에게도 이곳은 매력적인 장소로 통했다. 인상주의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도 '새로운 다리' 부근에 이젤을 세워놓고 일상적 단면을 포착하려 했다.

르누아르는 대중에게는 부드러운 터치와 따뜻한 색채의 여성 초상화나 누드화를 그린 화가로 기억된다. 적어도 한국에서 1970~1980년대 제작된 명화 캘린더의 상당수가 르누아르 작품이었다. 그만큼 그는 국내에서도 인지도가 높다. 그러나 그의 인기 있는 화풍은 어디까지나 후기 화풍에 속한다. 한창 젊을 때의 르누아르는 인물화 따위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는 파리의 아카데미 스위스에서 만난 모네,시슬레,바지유 등 인상주의 전위들과 어울리면서 빛의 효과를 탐구하는 데 자신의 온 정열을 바쳤다. '파리 퐁뇌프'는 회화의 미래를 개척한다는 사명감과 자부심의 산물이다.

어느 햇빛이 따사로운 오후 르누아르는 동생 에드몽과 함께 루브루궁 부근 모퉁이 카페의 위층인 앙트르솔(1층과 2층 사이의 중간층)을 잠시 빌렸다. 퐁뇌프의 일상을 화폭에 담기 위해서였다. 주인에겐 서너 시간 사용하는 대가로 커피 두 잔 값을 지불했다. 아직까지 빈털터리였던 르누아르로서는 좋은 앵글을 포착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큰 맘 먹고 주머니를 털었던 것이다.

그가 굳이 앙트르솔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작업하려 한 것은 일본판화의 조감법에서 배운 시점을 실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화면을 보면 절반이 하늘 묘사에 할애돼 있어 하늘 묘사를 중시한 네덜란드 화가들의 영향도 엿보인다. 그러나 네덜란드 화가들이 하늘을 마치 인간 초상화 그리듯 구름의 주름살까지 세밀하게 그렸던 데 반해 르누아르는 야트막하게 듬성듬성 내려앉은 구름을 거친 필치로 대충대충 그렸다. 다리를 건너는 마차와 인파의 모습도 마찬가지로 그려나갔다.

그는 퐁뇌프를 빛의 효과를 탐구하는 하나의 실험적 무대로 활용했다. 한낮의 눈부신 빛이 파리지앵의 삶과 마주치면서 연출해내는 색다른 인상을 재빨리 포착하려 한 것이었다. 그의 야심찬 시도가 성공했던 것일까. 퐁뇌프는 마치 은쟁반처럼 현란한 빛을 뿜어내 관객들로 하여금 집에 선글라스를 두고 온 것을 후회하게끔 만들 정도로 눈부시게 빛을 발하고 있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 퐁뇌프는 토목공이 아닌 화가의 손에 의해 '새로운 다리'로 거듭난 셈이다.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