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漢)나라 건립 때부터 무제(武帝) 초기까지 대략 70여년 동안은 금고에 보관돼 있는 돈이 억만금이나 됐는데 돈을 묶은 줄이 낡아서 셀 수조차 없었다. 조정의 창고에는 묵은 곡식이 넘쳐 노천에 모아두었다가 썩는 바람에 먹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지나친 흉노 정벌책은 경제에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했고 거듭된 토목사업으로 국가 재정은 말라갔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민간에 이양된 염철(鹽鐵) 사업을 국가가 다시 전매하자는 방안이었다. 한 무제는 민간에 넘어간 사영권을 관영(국영)으로 바꾸었다. 그 방식은 '민간에서 만들고 관청에서 거두며 관청이 운영하고 관청이 파는 것'이었으니,정부가 주축이 돼 염철을 경영하겠다는 것이다.

한 소제는 염철 등의 관영 사업이 한창이던 시원(始元) 6년(기원전 81년) 2월에 특별한 회의를 소집했다. 각 군국(郡國)의 현량(賢良)과 문학(文學) 등을 불러 염철과 술의 전매제도 및 균수(均輸) · 평준책(平準策) 존폐 문제를 두고 승상(丞相) · 어사대부(御史臺夫) 등 정부 측 대표와 토론을 벌이게 한 것.이들은 5개월에 걸쳐 격론을 벌였다. 바로 이 회의록을 재정리해 낸 책이 《염철론(鹽鐵論)》이다.

이 책의 저자 환관(桓寬)은 여남(汝南) 사람이다. 그의 인물됨과 《염철론》의 편찬 경위에 대해 《한서(漢書)》 '공손유전왕양채진정전찬'은 '환관이 《공양춘추(公羊春秋)》를 배워 여강태수(廬江太守)의 승(丞)이 되더니 박학하고 사리에 통하였으며 글을 잘 짓는 데다 (조정에 있었던) 염철의 논의를 풀어내고 조목을 늘리고,그 논쟁을 전부 재현해 저술을 남겼다'고 기록했다.

환관이 이 책의 제목을 《염철론》이라고 한 것은 이 회의 이후 술의 전매제는 폐지됐지만 소금과 철의 전매는 여전히 지속됐으며 소금과 철에 관한 논의를 실행하지 못한 것을 끝내 아쉬워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은 단순한 회의록이 아니다. 지식인들 사이의 논쟁을 당시 국가 경영전략과 연계해 사실감 있게 정리하면서 당대 최고의 쟁점인 염철 전매 문제를 진지하게 점검해 보려는 기록자의 모습이 담겨 있다.

환관은 정부 측의 소집 의도와 달리 만만치 않은 반론이 터져 나왔던 사안을 가감없이 기록하면서 입장이 전혀 다른 양측의 주장을 반영하려 했다. 즉 승상과 어사대부 등 정부는 지금 당장 힘써야 할 현안에 초점을 맞추어 논쟁을 이끌어가려 했으나 민간 측은 유가에 바탕을 둔 원론적이고 근원적인 것에 중점을 뒀다. 정부는 법가적 입장이었고 민간은 유가적 입장이어서 결국 유가사상을 현실적인 통치 스타일로 적용하느냐 아니면 진나라처럼 강력한 힘의 논리에 바탕을 둔 법가 논리를 국가 경영전략으로 삼느냐는 문제로 집약됐다. 이 회의에서 쌍방의 논쟁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어서 회의를 주최한 측이 정부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설전이 계속됐다. 치열한 논쟁 속에서 국가 경영전략,백성을 향한 애정 등이 양측의 입을 통해 흘러 나왔다.

요즘 검경의 수사권 조정 문제,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문제,의약분쟁 등 첨예한 문제들이 넘쳐나고 있다. 염철 논쟁에 수개월 동안 참여한 민간 측 인사들이 절대권력하의 정부 시책을 과감하게 비판하며 활발하게 토론문화를 이끌었던 상황을 떠올리면서 21세기의 대한민국도 갑을관계와 상하관계가 아니라 모두가 화합하는 공정한 사회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김원중 <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