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기술과 기발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현대미술의 심장 뉴욕.한국 현대미술의 대가 이우환 씨(75)는 이곳에서 "쉿! 조용!"하며 시끄러운 현대미술을 잠재워 버리는 듯하다. 지난 24일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개막한 이씨의 회고전 '무한의 제시(Marking Infinity)'전에서 그는 나선형으로 빙빙 돌아 6층까지 걸어 올라가는 이 미술관을 평생 작업한 작품 90여점으로 가득 채웠다.

돌 하나,철판 하나,점 하나로 구성된 그의 작품들은 말이 없다. 2.8m의 강철판이 벽에 기대어 있고,그 앞에 높이 80㎝의 둥그런 돌 하나가 마주 앉아 있는 '릴레이텀(Relatum-silence b,2008)'은 돌과 철판의 물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관객들을 명상에 빠지도록 하는 이씨의 대표적인 설치작품 시리즈다.

이씨에게 작가의 역할이란 관객의 눈을 자극하는 게 아니라 관객의 뇌를 자극하는 것 같다. 눈앞에 있는 '보이는 것'을 보면서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작가 생활 중 40여년을 한국과 일본,유럽 무대에서 활동한 그는 정작 미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게다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여는 회고전이라니,한국 작가로는 백남준 이후 그가 처음이다.

가만,백남준이 한국 작가인가. 그는 한국 미국 독일에서 활동한 국제적인 작가였다. 이씨도 이제 그런 작가가 됐다. 일본에서는 일본 작가라 하고,프랑스와 독일에서는 각각 자기네 나라가 키운 작가라고 한다. 그의 작품을 보고 한국과 일본 사람들은 동양적인 고요함이 있다고 하고,미국인들은 미국 미니멀리즘의 후기 경향을 보여준다고 한다.

그러나 세계 어디에서든 그를 소개할 땐 '한국 태생'이라는 말을 제일 먼저 꺼낸다. 무한의 경지를 탐구하는 그의 작품 바탕에 한국의 뿌리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한국미술 국제화'가 중요해진 요즘 국가색을 앞세우지 않으면서도 뚜렷한 한국 작가로 세계 미술의 중심 무대에 들어서는 게 얼마나 중요하고 대단한지를 이 전시는 보여주고 있다.

그의 구겐하임 전시는 우리 미술계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동안 '비싼 작가''한국을 대표하는 국제적 작가''유명한 작가'라고 수도 없이 소개되었지만 정작 그가 평생 어떤 작품을 해왔는지 이렇게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전시는 국내에서도 없었다.

이 전시에는 그의 1970년대 대표작인 '선으로부터(From Line)'와 '점으로부터(From Point)' 시리즈,1960년대에 했던 점화(Pushed-Up Ink),1980년대에 집중적으로 한 바람 시리즈 '바람으로부터(From Winds)'와 '바람과 함께(With Winds)',2000년대 후반의 '대화(Dialogue)'시리즈 등 회화,드로잉,설치 작품이 모두 걸렸다.

작품은 조용하지만,작가 이우환의 머릿속은 조용하지 않다. 그는 수많은 글을 발표하며 미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해 왔다. 일본에서는 1968년부터 1971년까지 쓴 평론과 이론서로 당시 일본 미술을 휩쓸었던 '모노하(物派)'의 중심 이론가가 됐다.

그의 이런 미술은 1970년대 한국 근대미술의 단색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구겐하임 측이 소개했듯이 그는 '미술가이자 철학가(artist-philosopher)'인 것이다. 전시는 9월28일까지 계속된다.

뉴욕=이규현 미술칼럼니스트 artkyu@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