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은 재미 작가인 저자가 10여년 동안 국내외에서 수집한 한국에 대한 86점의 근대 회화를 소개한 책이다.

1898년부터 1958년까지 외국 작가들과 우리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통해 봉건시대가 막을 내리고 근대 역사가 전개되는 과정,그 시기를 관통했던 정치적 사건과 사회 문화사를 추적한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장소 등에 대한 설명에만 그치지 않고 '고종실록'이나 '황성신문',미국 국무부 문서 등 각종 고증 자료를 활용해 당시 시대상과 역사적 사건 등을 자세히 설명했다.

1898년 조선을 방문한 네덜란드계 미국인 화가 휴버트 보스가 그린 '서울 풍경'은 막 근대기에 접어든 서울의 세종로와 광화문 일대 풍경을 묘사했다.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 건물 세 채가 저 멀리 보이고 그 앞으로 낮은 기와집들이 펼쳐진다. 뿌연 황톳빛 정경은 외세의 강제적인 개항 압력,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던 일본 · 청나라 · 러시아가 야기한 불안한 정국을 상징하는 듯하다.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이후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종이 경복궁을 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통스러운 근대 역사가 고스란히 비쳐진다.

1920년 서울주재 미국 영사의 딸이었던 릴리안 밀러가 그린 '한강과 대동강의 황포돛배'와 '내금강의 마하연'은 지금은 볼 수 없는 조선의 절경을 담았다. 황포돛배로 한강과 대동강을 오르내리던 경강상인들과 포구에서 그들과 물건을 거래하며 장사를 하던 객주들은 근대화와 함께 무역상과 상공인으로 발돋움했다.

1909년 10월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 역 풍경을 담은 삽화도 들어 있다. 저자가 미국의 한 경매 사이트에서 찾아낸 이 삽화는 사건 발생 12일 후인 1909년 11월7일 이탈리아 군사주간지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 1면에 실렸다. 삽화는 러시아 군인의 부축을 받은 채 늘어진 이토를 정면에서 잡았다. 뒤편으로는 역사와 함께 우왕좌왕하는 군중들이 그려져 있다. 한강 다리가 끊어져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건너려는 피란민들의 모습을 그린 이응로 화백의 '한강 도강'이나 전쟁이 끝난 후 부서진 건물을 복구하는 현장을 담은 '재건 현장'은 한국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변월룡의 1954년 작 '공훈무용가 최승희'는 친일파라는 비판과 함께 남편을 따라 월북해야 했던 무용가 최승희의 부채춤 자락이 구성진 유채화로 이념의 희생양이 된 예술가의 삶이 되살아난다.

이 밖에도 조선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의 언니이자 개화기 선각자인 유길준의 며느리였던 윤희섭의 모습,덕혜옹주의 유치원 및 초등학교 동창인 민영찬의 딸 민용아가 단아한 한복차림으로 기품 있게 서 있는 초상화,휴전 협의차 한국을 방문한 아이젠하워와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함경도에 사는 무명의 여성 독립운동가의 초상화 등을 볼 수 있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