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한인 교포사회에서 얼마 전 치러진 한인회장 선거를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교포인구 4만여명인 하와이의 한인회장은 과거 크게 인기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통상 두 명 정도가 출마해 중간에 교통정리되거나,끝까지 가도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번엔 달랐다. 후보가 네 명이나 나왔다. 선거양상도 뜨거웠다. 과거에 비해 두 배나 많은 라디오 토론회가 열렸다. 같은 유니폼을 입고 길거리에 나와 한 표를 부탁하는 '거리 선거'까지 목격할 수 있었다. 후보들이 쏟아낸 공약 중엔 현실성이 없는 것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막판에는 인신공격 양상까지 나타났다. 일부 후보가 자신의 강점을 부각시키기보다는 상대후보를 인신공격하는 '더티 게임'을 한 것이다. 선거 양상만 보면 '여기가 서울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한국 선거와 닮은 꼴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강기엽 씨가 21대 한인회장으로 선출됐지만,후유증이 만만치 않을 것이란 지적이 나왔다.

한 교민은 "교민회장 자리가 내년 고국에서 치러지는 선거에서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비단 하와이만이 아니다. 지난달 있었던 미주한인총연합회(미주총련) 회장 선거를 둘러싼 부정시비로 최근 미국 교포사회가 시끄럽다. 회장선거에서 패한 인사가 승자로부터 거액의 금품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일각에선 '미주총련 무용론'까지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동포사회 곳곳에서 나오는 파열음은 내년 도입되는 재외동포 참정권 부여와 무관치 않다. 정말 큰 일이다. 한국경제신문이 지난 5월13일 '교포사회에선 무슨 일이'라는 기획을 통해 지적했듯이 내년 4월 총선거와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교포사회의 줄서기와 편가르기가 심화되고 있다.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분열 양상은 더 심해질 게 뻔하다.

우리 정치권의 책임이 크다. 동포사회의 분열은 표를 겨냥한 정치권의 무분별한 바람몰이 행보의 결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외동포들에게 비례대표 의원직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동포사회의 분열을 부추긴 건 다름아닌 여야 정치권이다. 여야의 예비 대선주자들이 경쟁적으로 동포사회를 찾아 잔뜩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여기엔 표 논리가 작용한다. 과거 몇 차례 대선 승부가 불과 50여만표 안팎에서 갈렸다. 투표권을 행사할 재외동포 유권자는 230여만명으로 추산된다. 투표율이 20%정도만 돼도 박빙선거의 승패를 가를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이 가능하다. 선거 후 예상되는 후유증은 안중에도 없다. 오로지 정치권의 '승리지상주의'만이 자리하고 있다.

민주주의 선거라는 게 본래 필요악인 측면이 있다. 우리에겐 더더욱 그랬다. 민의를 반영하기 위해선 선거가 필요하지만,그동안 후유증이 너무 컸다. 뿌리깊은 영 · 호남 지역갈등과 반복되는 소수정권의 등장과 실패는 바람몰이 선거의 산물이었다. 우리의 저급한 '4류정치'가 해외동포사회마저 오염시키고 있는 게 현실이다. 재외동포들에게 고국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단합을 유도하자는 취지로 도입된 참정권 부여 조치가 동포사회의 분열을 야기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게다가 여러가지 제도 미비로 벌써부터 후유증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과연 누구를 위한 재외동포 참정권 부여인가. 동포사회의 화합과 결속이 아닌 분열로 귀결되는 참정권 부여라면 차라리 일정 기간 연기하는 게 낫다.

이재창 정치부장 lee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