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 속 장진호 전투 덕에 흥남철수 성공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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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하와이서 6ㆍ25 기념식 참석한 참전용사 제임스 워드 씨
"1950년 그 겨울 혹독한 추위 속에 흥남부두 북방에 있는 인공호수 장진호에서 벌였던 전투 상황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미 태평양 국립묘지에서 지난 25일(현지시간) 열린 6 · 25전쟁 61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참전 용사 제임스 워드 씨(81 · 사진)는 60년 전을 기억하면서 몸을 떨었다. 그는 "밤 기온이 영하 30도 이하로 떨어져 온 몸이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였다"며 "적의 야간 공격은 공포에 가까운 충격을 줬다"고 장진호 전투를 회고했다.
미국 아이오와주 출신인 워드 씨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950년 10월 6 · 25전쟁에 미 해병대원으로 참가했다. 그가 속한 해병대 1사단은 6 · 25전쟁의 3대 상륙작전 중 하나인 원산상륙작전과 장진호 전투에 투입됐다. 순조롭게 끝난 원산상륙작전과 달리 장진호 전투는 세계 전투사에 남을 정도로 유명할 만큼 치열했다.
그는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 1사단이 12만명 규모의 중공군 7개 사단의 포위망을 뚫고 후퇴한 작전"이라며 "전투가 얼마나 처참했는지 소속부대원 20명 가운데 내가 유일한 생존자"라고 그 당시의 긴박함을 전했다. 장진호에서 미군은 3637명이 죽거나 다쳤고 중공군도 2만5000명이 사망했다.
처절한 전투를 벌였지만 장진호에서 미군이 2주간 중공군의 발목을 잡은 덕분에 '흥남철수작전'은 무사히 진행될 수 있었다. 흥남철수작전으로 민간인 10만명과 장진호에서 철수한 미 해병 1사단을 비롯 유엔군까지 포함해 12만명이 194척의 함정을 타고 함경남도 흥남을 빠져나왔다.
그는 "침몰 위험을 무릅쓰고 여성과 아이 등 10만명의 북한 주민을 남한으로 철수시켰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당시 흥남에서 거제도까지 항해한 빅토리아 메리디스호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지난해 '생명의 항해'란 뮤지컬로 제작되기도 했다.
워드 씨는 지난해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서울 용산동 전쟁기념관에서 만난 한국 청소년들이 우리나라를 위해 싸워줘 고맙다며 따뜻하게 안아줬다"며 "한국을 위한 희생은 값진 것이었다"고 했다. 그는 아직도 '초진 퓨(Chosin Few · 장진호에서 살아남은 소수)'라고 쓰인 베레모를 쓰고 있었다. 한국을 위해 희생한 그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우섭 기자 duter@hankyung.com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미 태평양 국립묘지에서 지난 25일(현지시간) 열린 6 · 25전쟁 61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참전 용사 제임스 워드 씨(81 · 사진)는 60년 전을 기억하면서 몸을 떨었다. 그는 "밤 기온이 영하 30도 이하로 떨어져 온 몸이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였다"며 "적의 야간 공격은 공포에 가까운 충격을 줬다"고 장진호 전투를 회고했다.
미국 아이오와주 출신인 워드 씨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950년 10월 6 · 25전쟁에 미 해병대원으로 참가했다. 그가 속한 해병대 1사단은 6 · 25전쟁의 3대 상륙작전 중 하나인 원산상륙작전과 장진호 전투에 투입됐다. 순조롭게 끝난 원산상륙작전과 달리 장진호 전투는 세계 전투사에 남을 정도로 유명할 만큼 치열했다.
그는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 1사단이 12만명 규모의 중공군 7개 사단의 포위망을 뚫고 후퇴한 작전"이라며 "전투가 얼마나 처참했는지 소속부대원 20명 가운데 내가 유일한 생존자"라고 그 당시의 긴박함을 전했다. 장진호에서 미군은 3637명이 죽거나 다쳤고 중공군도 2만5000명이 사망했다.
처절한 전투를 벌였지만 장진호에서 미군이 2주간 중공군의 발목을 잡은 덕분에 '흥남철수작전'은 무사히 진행될 수 있었다. 흥남철수작전으로 민간인 10만명과 장진호에서 철수한 미 해병 1사단을 비롯 유엔군까지 포함해 12만명이 194척의 함정을 타고 함경남도 흥남을 빠져나왔다.
그는 "침몰 위험을 무릅쓰고 여성과 아이 등 10만명의 북한 주민을 남한으로 철수시켰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당시 흥남에서 거제도까지 항해한 빅토리아 메리디스호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지난해 '생명의 항해'란 뮤지컬로 제작되기도 했다.
워드 씨는 지난해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서울 용산동 전쟁기념관에서 만난 한국 청소년들이 우리나라를 위해 싸워줘 고맙다며 따뜻하게 안아줬다"며 "한국을 위한 희생은 값진 것이었다"고 했다. 그는 아직도 '초진 퓨(Chosin Few · 장진호에서 살아남은 소수)'라고 쓰인 베레모를 쓰고 있었다. 한국을 위해 희생한 그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우섭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