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주한유럽상공회의소(EU상의)는 '시장진입장벽 백서'를 발표했다. 우리나라에서 사업을 하면서 직면하는 규제 내용을 제시하고,관련 부처와의 협의를 통해 개선된 사항과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자세하게 정리해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있다.

이를 보면서 몇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먼저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가 나서서 주요 수출 대상국에 대한 시장장벽 보고서를 발간하지만,유럽 국가의 기업들은 민간단체인 EU 상의가 직접 제기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한다는 점이다. 현안으로 제기된 사항을 보면 외국인 기술자에 대한 세제혜택 확대와 같은 기업 활동에 직결되는 사안이 많지만,순수 국내 정책을 현안으로 제기하는 사례가 있다. 예를 들어 부동산분과에서는 전철 역세권 활성화를 내세우고 있는데,외국기업들이 주장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

둘째 EU라는 기구와 조직의 힘이 작용한다는 점이다. 개별 국가 차원에서 상대국의 규제기관에 규제조치의 문제점과 완화를 요청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27개국으로 구성된 EU 차원의 상의에서 제기하는 통상현안을 실무자들이 무시하기 어렵다. 또한 유럽이나 미국의 상공회의소는 자국 정부와 긴밀하게 협력하므로 민간 차원의 요청을 무시할 경우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협의를 해 올 것이란 점을 잘 알고 있다. 이틀 전인 22일 한 · EU 공동위원회에서 유럽측은 EU 상의가 제기한 관심사항을 이미 우리 정부에 전달했다.

셋째 한 · EU 자유무역협정(FTA) 발효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내면서도 보다 확실한 경제효과 실현을 위해 우리나라 시장규제 완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말을 아끼고 있으나,최근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포퓰리즘과 비(非)시장적 규제를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U 국가에게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기업형 슈퍼마켓(SSM)에 대한 규제는 말할 것 없고,현재 정치권에 퍼지고 있는 포퓰리즘에 따라 도입되는 규제가 한 · EU FTA와 배치될 수 있음을 경계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정치권은 EU 상의의 충고를 귀담아 듣고,EU뿐만 아니라 우리 기업들의 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는 규제 도입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특히 지나친 포퓰리즘을 막아야 함을 주장하는 허창수 전경련 회장을 국회로 불러 따지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이 우리 국회의 현주소이다.

진정 일하는 국회라면,이미 통과된 한 · EU FTA 이행법에 부합하도록 관련 법을 조기에 개정하는 데 촌각을 다투어야 할 것이다. 금요일로 예정된 EU와의 FTA 이행을 위한 관련 법 개정이 늦어지고 있어 우리나라 정책실무자들이 애를 태우고 있다.

또한 기업들의 FTA 활용 준비가 더딘 점도 EU와의 FTA 발효를 앞두고 큰 문제로 떠올랐다. EU와의 FTA를 활용할 수 있는 '인증수출자' 지정을 받은 기업은 1381개로 대상 기업 6000여개의 4분의 1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관세청과 전국 일선 세관,무역협정 국내 대책본부 등이 나서서 EU와의 FTA 활용을 위해 인증수출자 자격을 받아야 함을 홍보하고 있으나,우리 기업들의 관심은 아직 낮은 편이다.

한편 FTA 발효 이후 우리나라와 EU 간 통상분쟁이 늘어날 수 있어,이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지리적 표시,원산지 검증,위생검역 등에서 양측간 마찰이 우려되고,그 경우 우리가 수세적인 입장에서 EU측 공세를 막아야 하는 상황이 많을 것이다. 협정 이행 초기 FTA 특혜무역질서 확립을 위해 EU는 의심이 가는 수출품에 대한 원산지 검증을 강도 높게 요구할 것이므로 이에 대한 대비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

정인교 < 인하대 경제학 교수 / 한국협상학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