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파나마운하 개통으로 미국은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해양 고속도로는 정치 · 군사 · 경제적으로 아시아 아메리카 유럽을 긴밀하게 통합시켰다. 그런 전 지구적 통합이 초래한 변화 과정에서 가장 큰 혜택을 입은 나라는 미국이었다.

운하는 미국의 엄청난 자본과 기술로 만들어졌고,미국의 통제 아래 놓였으며,미국의 성장에 중요한 촉매로 작용했다. 과거 미국 동부지역에서 서부지역으로 가려면 아메리카 대륙 남단의 케이프 호른을 돌아 2만5000㎞에 달하는 거리를 항해해야 했지만,파나마운하 개통 이후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통이 빨라졌다.

이제 대륙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통해 서부의 광물과 농업 자원을 미시시피 유역,오대호,동부 해안의 산업과 연결시켜 새로운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운하는 또 대서양과 태평양의 해군력을 하나로 통합시켜 막강한 군사력을 가져다주었다.

아메리카 대륙을 관통하는 운하를 건설하자는 아이디어는 이미 16세기에 스페인 탐험가 코르테스가 제시했지만 실제로 이 계획을 추진한 것은 수백 년이 지난 1880년이었다. 그 전 해에 이집트의 수에즈운하 건설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프랑스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 자작이 다시 이 사업에 달려들었다.

그는 중남미의 짧은 지협에 운하를 파는 일은 훨씬 쉬울 것으로 낙관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사정이 전혀 달랐다. 수에즈는 덥고 건조하며 평평한 지역이어서 공사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물 부족 정도였다. 그와 반대로 파나마는 물이 지나치게 풍부해 강이 넘치고 진흙더미가 흘러내리는 데다 치명적인 질병을 옮기는 모기가 서식하는 무더운 열대지방이었다.

드 레셉스가 막대한 손해를 입은 채 물러나자 1903년에 미국이 이 사업을 인수했다. 미국은 프랑스 회사로부터 운하굴착권과 설비 일체를 4000만달러라는 헐값에 인수했다. 운하 건설 지역의 치외법권을 사들이려는 계획이 콜롬비아 상원에서 부결되자 시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 나라 내정에 간섭해 파나마를 아예 독립국가로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미국은 수시로 해병대를 상륙시키는 노골적인 제국주의 정책을 통해 카리브해를 마치 자기 나라의 호수처럼 만들고는 본격적으로 운하 건설에 착수했다.

처음에는 지협을 가로질러 해수면 높이의 깊은 물길을 파내는 드 레셉스의 계획을 되살리려 했지만,태평양 방면과 대서양 방면 사이의 수면표고(水面標高) 차이가 컸기 때문에 결국 갑문(閘門)식 운하 건설로 방향을 잡았다.

전체 사업의 큰 그림은 양쪽에 초대형 호수를 만들고,중간 지역에 수로를 뚫어 양쪽 호수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물길을 낸다는 것이었다. 우선 거대한 댐을 건설, 카리브해로 흘러드는 차그레스강을 막아 세계 최대의 인공 호수인 가툰호를 만들었고,다음에 반대편 파나마만 쪽에도 미라플로레스호수를 만들었다. 그 중간의 구릉지를 파서 15㎞ 길이의 쿨레브라 수로를 여는 것은 현대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거대한 사업이었다.

강철로 된 거대한 계단식 갑문을 만드는 데 사용된 콘크리트 양은 당시까지 단일 공사로서는 세계 최대를 기록했다. 이 계획의 성공 여부는 세 가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한때 전체 노동자의 80%까지 무력화시켰던 말라리아와 황열병 같은 열대 질병을 억제하는 것,걷잡을 수 없이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차그레스강의 흐름을 제어하는 것,가장 어려운 숙제로서 거대한 진흙더미가 흘러내리는 산을 뚫고 길을 내는 것이 그 문제들이었다.

1907년부터 1914년까지 매년 3만3000~4만명의 노동자가 참여해 끊임없이 땅을 팠다. 그들은 찜통더위나 폭우 속에서도 밤낮으로 작업을 계속했다. 산을 폭파시키고,바위와 흙더미를 옮기고,우기에는 반복되는 산비탈의 진흙 사태로 흙더미 아래 묻힌 공사용 기계를 파내야 했다.

쿨레브라 수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파낸 흙의 양은 상상을 초월한다. 50~60대의 거대한 증기 굴착기가 하루에 열차 500대 분량의 흙을 퍼냈다. 이 작업 시스템의 생명은 대형 철도망이었다. 기차를 통해 기계를 운반하고 거대한 흙을 날랐다. 1913년 5월 드디어 서로 다른 방향에서 작업을 진행하던 두 대의 굴착기가 만났다. 몇 달 후인 1913년 10월, 워싱턴에 있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운하에 물을 채우기 위해 둑을 무너뜨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공사는 정해진 기한에 맞추어 끝났다. 1914년 8월15일,총 3억7500만달러를 투입한 초대형 사업이 완성된 것이다.

어느 면에서 보건 운하는 대성공이었다. 개통 후 10년 이내에 운하는 매년 약 5000척의 선박이 통과하는 수로가 됐다. 1970년까지는 매년 1만5000대가 넘는 배들이 10~12시간 걸리는 이 운하를 통과하며 1억달러가 넘는 통행료를 지불했다. 그 후 주기적인 확장과 개선 작업이 이루어져 대규모 전함이나 초대형 유조선 또는 거대한 화물 컨테이너 수송선도 운하를 지나갈 수 있게 됐다.

이런 변화는 20세기 후반 세계 경제의 통합을 뒷받침하는 해운 혁명의 근간이 됐다. 이 혁명은 세계의 항구를 변모시켰다. 짐을 선착장에서 하역하는 대신 컨테이너를 직접 기차나 트럭에 실어 최종 목적지로 보내게 된 것이다.

85년 동안 미국이 관리해 온 파나마운하 운항권은 20세기 마지막 날인 1999년 12월31일자로 파나마에 이양됐다.

주경철 <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