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최근 서울 신라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그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기 전에 소프트뱅크의 미래에 관해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100쪽 분량의 자료를 넘기며 먼 미래 얘기를 했다. 소프트뱅크의 30년 비전을 만들기 위해 300년 앞을 생각했다고 했다.

뜬구름 같은 얘기를 한 것은 아니다. 손 회장은 무어의 법칙을 적용해 트랜지스터 연산능력이 300년 뒤엔 10의 60제곱으로 늘어나 폰에 영화 300년 분량을 저장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라이프스타일과 워크스타일이 엄청나게 바뀌고 패러다임이 혁명적으로 변화할 것이라고 했다.

손 회장의 프레젠테이션은 감동적이었다. 1년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판에 30년 후,300년 후 세상에 관해 얘기한다는 것은 대단한 내공과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프레젠테이션을 들으며 우리나라에는 왜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을까,10년 정보혁명 비전을 제시해주는 국가 최고정보책임자(CIO)는 과연 누구일까 생각해 봤다.

국가정보화전략위원회는 최근 '미래를 대비한 인터넷 발전계획'을 만들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지금보다 100배 빠른 스마트 네트워크를 구축해 인터넷 글로벌 리더로 도약한다는 게 요지다. 주무부처인 방송통신위원회 담당 과장이 기자실에서 브리핑했다. 대통령한테 보고할 정도의 사안을 과장이 브리핑하는 게 의외였다.

브리핑을 듣는 동안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지금 우리가 구글이나 페이스북에 끌려가는 게 네트워크가 미국보다 뒤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글로벌 인터넷 리더가 되겠다고 하면서 에코시스템을 어떻게 개선해 나갈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보안을 강화하겠다고 했지만,해커가 들으면 콧방귀를 낄 정도에 불과했다.

부아가 치민 것은 단순히 발전계획 내용이 미흡하다고 생각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보혁명이 가져올 5년 후,10년 후의 모습에 관해 자신있게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게 너무 아쉬웠다. 방통위를 출입하고 있지만 방통위원장이 국가 CIO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국가 최고기술책임자(CTO)란 생각은 더더욱 들지 않는다.

정보통신업계에서 입 달린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하는 얘기가 있다. "지금과 같은 시스템으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정보통신 비전문가 위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위원들의 합의로 정책을 결정하는 현행 방통위 체제로는 방송과 통신이 융합하는 시대,세계 정보기술(IT) 업계가 초고속으로 요동치는 시대를 이끌어갈 수 없다는 얘기다.

정보통신부를 해체하고 방통위를 설립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정통부가 막판에 헛발질을 많이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도 입 달린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현행 체제는 헛발질해대는 정통부보다 못하다고.2013년에 들어설 새 정부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달라져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정보기술 세상에서는 그야말로 졸면 죽는다. 세계 최강으로 꼽히던 노키아가 아이폰 한 방에 나가 떨어졌다. 세계 최고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라던 마이스페이스는 페이스북에 밀려 벼랑 끝에 서 있다. 정책도 마찬가지다. 정보기술에서는 정책이 잘못되면 5년,10년 뒤지는 게 예사다. 10년 앞을 명확히 얘기해줄 수 있는 국가 CIO가 아쉽다.

김광현 IT전문기자 kh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