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1958년 제1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최종 경연을 앞두고 옛 소련 주최 측에 비상이 걸렸다. 예선에서 경쟁국 미국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이 발군의 실력으로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쏘아올린 여세를 몰아 국제 콩쿠르에서도 우승,소련의 위상을 한껏 높이려는 계획에 차질이 생겼던 것이다. 주최 측은 고심 끝에 크렘린에 전화를 넣었다. "실력대로 심사하라"는 사인이 나왔고 결국 클라이번은 첫 우승자가 됐다.

소식을 전해들은 미국인들은 열광했다. 클라이번은 대서양 무착륙 횡단비행에 성공해 영웅이 된 찰스 린드버그 못지 않은 환영을 받았다. 냉전 체제에서 사사건건 대립하던 소련을 현지에서 누르고 미국의 자존심을 세웠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로 인해 콩쿠르는 국제적 관심을 끌며 단숨에 유명해졌고 미 · 소 화해 무드 조성에도 적지않은 역할을 했다.

1974년 피아니스트 정명훈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2등을 했을 때 우리도 흥분에 들떴다. 1등 없는 2등이었으니 우승이나 다름 없었다. 정명훈은 김포에서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했다. 오색 종이가 흩날리는 길가엔 수만명의 시민이 나와 태극기를 흔들었다. 대대적 환영행사에 이어 은관문화훈장 수여가 결정됐다. 어렵던 시절 국민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 '사건'이었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는 4년마다 열린다.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성악 등 네 분야다. 벨기에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폴란드의 쇼팽 콩쿠르와 함께 세계 3대 콩쿠르로 꼽히는 만큼 음악도들은 한번 도전해 보는 것만으로도 긍지를 갖는다고 한다. 입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 만하다. 그런데도 1990년 성악 최현수 우승,1994년 백혜선 피아노 3위,2002년 김동섭 성악 3위 등 쾌거가 잇따랐다.

국력에 맞춰 음악 실력이 더 좋아지는 걸까. 지난달 15~30일 열린 제 14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주요 부문을 우리 젊은이들이 휩쓸었다고 한다. 베이스 박종민,소프라노 서선영이 남녀 성악 우승,손열음 조성진 피아노 2,3위,이지혜 바이올린 3위 등을 차지했다니 대단하다. 대부분 한국 고교나 대학에서 음악을 배운 '국내파들'이라 의미가 더 크다. 뛰어난 재능에 피나는 훈련이 뒷받침된 결과일 게다. 우리가 경제,스포츠에 이어 문화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하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