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의약품 갈등' 국민 선택권이 우선
최근 소화제,해열제,감기약,파스 등 가정상비약의 약국외 판매 허용 여부를 놓고 정부와 시민단체,그리고 의료계 전문직 간에 논쟁이 뜨겁다. 국민의 편익과 의약품 사용의 안전성에 관한 논의인가 싶더니 어느새 이해 당사자들의 힘겨루기가 됐고,이어 의료산업과 국가 경제에 미치는 효과를 운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일반의약품의 약국외 판매 문제의 본질은 '약사의 손을 거치지 않고 소비자에게 의약품 선택권의 일부를 맡기는 것이 옳은가'에 있다.

일각에서는 일반의약품의 약국외 판매를 허용한다면 국민들이 의약품을 오 · 남용할 우려가 크기 때문에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그런 시각에는 쉽게 수긍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일반의약품을 마트나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것이 심각한 약물 오 · 남용 문제를 초래하고 국민 건강에 위해가 된다면 미국이나 일본,영국,독일,덴마크 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선진국 중 절반에 가까운 나라에서 이를 모르고 허용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의약품의 전문가인 약사를 통해 '편리하게' 의약품을 구입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지금 이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편리성이 담보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럽 등지에서 약국 1개당 인구가 3000명 이하인 국가들 중 일반의약품의 약국외 판매를 허용하는 나라가 별로 없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당장 우리나라가 그만큼 주말과 야간에 1차의료에 대한 접근성이 확보돼 있느냐고 반문하고 싶다.

일반약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건강문제는 비싼 요금을 치러야 하는 전문가를 찾기보다는 자가치료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의료비를 절감하는 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일반의약품의 약국외 판매 논의가 시작된 10년 전과 비교해보면 지금은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교육수준이 높아졌고 평균수명의 증가와 함께 건강에 대한 의식수준도 높아졌다.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등으로 건강정보에 대한 접근성도 매우 높다. 이제 소비자는 자신의 건강 문제에 직접 관여하고 싶어하고 의사결정에 더 많은 선택권을 가지기를 원한다.

따라서 일반의약품의 약국외 판매 문제에 대해서는 국민 다수가 원하는 방향으로,즉 국민의 편의를 도모하고 의약품에 대한 선택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마련하는 것이 그 해답이다. 또한 일반의약품의 약국외 판매는 장기적으로 볼 때 국민에게 자신의 결정에 책임지는 법을 배울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합리적인 소비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환자 중심의 책임성 있고 조화로운 의료'를 향한 움직임,이른바 PAC(Patient-Centered,Accountability and coordinated) 운동이 활발하다. 소비자 주권이 크게 신장돼 있는 미국에서는 심지어 DIY(Do It Yourself) 건강개혁 운동까지 벌어지고 있다.

우리 국민들이 미래의 급변하는 의료환경에서 자신의 건강문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합리적인 소비자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위험이 작은 모험을 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일반의약품의 약국외 판매도 그런 맥락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급변하는 사회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스스로 변하지 못하면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의해 변화를 당할 수밖에 없다. 이번 사례는 약사들이 국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해 치러야 했던 값비싼 배움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를 계기로 의사와 약사가 앞으로 국민건강 향상을 위해 협업을 하려는 노력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의료전문가들 해야 할 미래를 위한 가치투자다. 가치투자를 못하면 미래도 같이 희미해진다.

배성윤 < 인제대 경영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