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길진 칼럼] 선(善)과 악(惡)의 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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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대구 야구장에서 경기도중 정전사태가 발생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정전이라, 특히 경기장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경기는 그냥 다음 날로 연기되었지만, 만약 미국처럼 시내가 예고 없이 정전이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2003년 8월 14일 뉴욕은 거대한 정전사태를 맞았다. 어느 누구도 세계 최고의 도시 뉴욕이 순식간에 암흑천지로 바뀌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지하철과 열차가 정지하고, 브루클린 다리는 차량과 도보로 뉴욕을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이 서로 뒤엉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뉴욕의 정전은 단순한 정전을 넘어 목숨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서로를 믿으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질서정연하게 행동하는 듯 했다. 그러나 밤이 오자 예상했던 사태가 발생했다. 슈퍼마켓·상점 등 가게가 약탈당하고 집단폭행사고의 신고가 빗발쳤다.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뉴욕의 정전사태처럼 한 순간 잠재되어 있던 악(惡)의 DNA를 겉으로 드러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진과 해일사태에서도 질서정연했던 일본국민들처럼 최대한 끝까지 누르고 가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사람은 선하게 태어났을까, 악하게 태어났을까. 성선설과 성악설을 두고 지금까지도 대치하고 있지만 영원히 답을 쉽게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선(善)의 DNA와 악(惡)의 DNA 둘 다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본성은 카르마에 의해 좌우되며, 카르마는 셀 수 없이 많은 탄생의 역사에 기원하기 때문에 하나로 단정 짓기 힘들다.
이런 이유로 사람을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기원전 44년, 로마제국의 줄리어스 시이저는 자신이 자식같이 아끼던 브루투스에 의해 암살당한다. 워낙 배짱이 두둑하고 독선적인 사람이라 적이 많았던 시이저는 사람을 쉽게 믿지 않았지만, 브루투스에 대한 사랑만은 남달랐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달랐던 브루투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때 시이저의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오죽하면 ‘브루투스 너마저’란 말이 마지막 유언이 됐겠는가.
“다른 사람은 다 아니라 해도 그 사람만은 내 편인 줄 알았습니다.” “모두들 그 사람을 그렇게 믿지 말라고 했지만 저는 믿고 싶었습니다.”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동업자가 회사가 어려워지자 회사 자금을 가지고 사라져 버려, 결국 회사는 망하고 채권자로부터 시달림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하소연을 하였다.
그는 경제적 배신도 참기 어렵지만 더 참기 힘든 것은 자신과의 인연마저 부인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둘도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자기는 그렇지 않았다고 그 관계를 부인해 버리면 당하는 사람은 얼마나 괴로울 것인가. 병으로 생긴 상처는 치료하면 되지만,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는 치료하기도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그리고 후유증도 길다.
“나에게서 떠난 것은 잊어버려라.”배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소연할 때, 생활의 신조처럼 여겨온 말이다. 선함과 악함을 두고 고민하지 말고 주는 즉시 잊어버린다면 마음의 상처는 받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은혜는 꼭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기보다는, 상대방이 후회하지 않도록 행동을 하면 될 것이다. (hooam.com/whoi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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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뉴욕의 정전은 단순한 정전을 넘어 목숨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서로를 믿으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질서정연하게 행동하는 듯 했다. 그러나 밤이 오자 예상했던 사태가 발생했다. 슈퍼마켓·상점 등 가게가 약탈당하고 집단폭행사고의 신고가 빗발쳤다.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뉴욕의 정전사태처럼 한 순간 잠재되어 있던 악(惡)의 DNA를 겉으로 드러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진과 해일사태에서도 질서정연했던 일본국민들처럼 최대한 끝까지 누르고 가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사람은 선하게 태어났을까, 악하게 태어났을까. 성선설과 성악설을 두고 지금까지도 대치하고 있지만 영원히 답을 쉽게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선(善)의 DNA와 악(惡)의 DNA 둘 다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본성은 카르마에 의해 좌우되며, 카르마는 셀 수 없이 많은 탄생의 역사에 기원하기 때문에 하나로 단정 짓기 힘들다.
이런 이유로 사람을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기원전 44년, 로마제국의 줄리어스 시이저는 자신이 자식같이 아끼던 브루투스에 의해 암살당한다. 워낙 배짱이 두둑하고 독선적인 사람이라 적이 많았던 시이저는 사람을 쉽게 믿지 않았지만, 브루투스에 대한 사랑만은 남달랐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달랐던 브루투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때 시이저의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오죽하면 ‘브루투스 너마저’란 말이 마지막 유언이 됐겠는가.
“다른 사람은 다 아니라 해도 그 사람만은 내 편인 줄 알았습니다.” “모두들 그 사람을 그렇게 믿지 말라고 했지만 저는 믿고 싶었습니다.”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동업자가 회사가 어려워지자 회사 자금을 가지고 사라져 버려, 결국 회사는 망하고 채권자로부터 시달림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하소연을 하였다.
그는 경제적 배신도 참기 어렵지만 더 참기 힘든 것은 자신과의 인연마저 부인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둘도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자기는 그렇지 않았다고 그 관계를 부인해 버리면 당하는 사람은 얼마나 괴로울 것인가. 병으로 생긴 상처는 치료하면 되지만,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는 치료하기도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그리고 후유증도 길다.
“나에게서 떠난 것은 잊어버려라.”배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소연할 때, 생활의 신조처럼 여겨온 말이다. 선함과 악함을 두고 고민하지 말고 주는 즉시 잊어버린다면 마음의 상처는 받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은혜는 꼭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기보다는, 상대방이 후회하지 않도록 행동을 하면 될 것이다. (hooam.com/whoi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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