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시민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미덕을 키우기 위해 여유가 필요하다. 따라서 농부가 돼서는 안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세상 사람들은 일을 너무 많이 한다. '노동이 미덕'이라는 믿음 때문에 엄청난 손해가 생겼다. "(버트런드 러셀)

이런 주옥 같은 명언을 남길 사람들은 철학자밖에 없는가. 슬프게도 김과장 이대리들이 자신있게 휴가를 요구할 수 있는 시기는 1년에 한 번 여름 휴가 때뿐이다. 휴가철,오랜만에 갖는 꿀맛 휴식과 함께 일정을 잘 잡으면 상사가 없는 '무두절(無頭節)'의 즐거움을 보너스로 누릴 수 있다. 반면 부하 직원의 '난 자리'를 온몸으로 느끼는 때도 휴가철이다. 임원에서부터 말단 직원까지,직급별 휴가에 따른 사무실 풍경을 정리해 본다.

◆임원이 휴가 가면 '부장 없는 날'

주류 업체 A사의 김 대리가 전하는 휴가철 사무실 모습.임원이 휴가를 가면 부장이 사라진다. 임원에게 업무보고를 할 필요가 없게 되자 계속 자리를 비우는 것.부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는 주식 거래할 때뿐인 것 같다. 부장이 없으니 부원들은 매일 금요일 같다. 평소 구내식당에서 '짬밥'만 먹다 인근 맛집에서 한 시간반 동안 여유로운 점심을 즐길 수도 있다.

그러나 임원이 복귀하기 전날,부장의 신경은 평소보다 배로 날카로워진다. 부재 중 업무 진행 상황을 보고서로 작성해야 하지만 부장과 실무자가 함께 놀아온 터라 보고할 내용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결국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장,대리들만 달달 볶는다. 김 대리는 "작년 어느 날 우리 상무님의 표정이 너무 밝고 편안하시기에 '왜 저러시나' 했더니 사장님이 휴가 중이셨다"며 "무두절의 즐거움은 위나 아래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고 말했다.

◆부장의 휴가는 '어린이 날'

부장이 휴가를 가면 진정한 무두절,소위 '어린이 날'이 된다. 보고 거리가 사라지고,'쪼는 이'도 없어지자 업무 시간에도 인터넷 검색과 쇼핑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과장들은 출근 시간에 딱 맞춰 오거나,5~10분 정도는 예사로 늦는다. 지각을 하면서도 얼굴엔 웃음이 남아 있다. 팀원들도 함께 미소짓는다. 칼퇴(정시 퇴근)는 물론이다. 전 부원들이 행복을 느끼는 때다.

기분이 좋아진 과장들은 아이스크림과 음료수를 쏘기 시작한다. 한 유통업체의 임모 과장은 "아내랑 자식 데리고 휴가 가면 쉰 것 같지도 않은데 팀장이 휴가 가면 에어컨 빵빵한 사무실에서 다리 뻗고 있을 수 있어 진짜 휴가"라며 "휴가 가서 이틀에 한 번꼴로 전화 걸어 업무를 챙기는 부장이 있는데,'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윗선에서 결정을 내려줘야만 하는 업무는 중단되기도 하고,차상급자 요량대로 일을 추진하다 휴가에서 돌아온 부장과의 의견 충돌로 난처한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또 체력을 회복한 부장이 복귀하자마자 회식날을 잡고 평소 이상의 잔소리와 함께 농도 짙은 폭탄주를 말아 돌리는 것도 애로사항이다.

◆유능한 대리가 휴가 가면 '생지옥'

굵직한 현안과 일상적인 잡무 사이에 끼어 있는 대리가 휴가를 갈 때 부서에서는 타격이 가장 크다. 부장 입장에선 사원들의 업무처리 능력이 답답하고 사원 입장에선 업무강도가 급증함을 느낀다. 중견업체 L사의 박모 과장은 "대리들의 역량은 이때 진가가 드러나는 것 같다"며 "일 잘하는 대리들은 보통 진행 중인 업무의 일정과 예상 결과 등을 상사에게 미리 보고하고 장기 휴가를 낼 땐 번거롭더라도 가끔 회사에 전화해 변동사항이나 특이사항을 체크하곤 한다"고 전했다.

따라서 대리들에게는 자신의 휴가로 선배들이 고생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한 자세다. 작년 8월 선배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휴가를 다녀온 소재업체 직원 현모 대리는 그 사이 프로젝트 마감 때문에 선배들이 시쳇말로 '뺑이 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복귀 날 아침 현 대리는 일찍 출근해 여행지에서 구입한 엽서에 정성스러운 손글씨로 감사 인사를 적었다. 선배들 덕에 휴가를 잘 다녀왔고,부모님께서 식사를 꼭 대접하라고 전하셨다는 식의 내용이다. 엽서와 함께 열쇠고리와 집에서 싸온 샌드위치도 올려 놓았다. 현 대리를 벼르고 있던 선배들은 출근 후 자리에 앉아 너털웃음을 짓고 말았다.

◆'난초'에서 느끼는 막내의 공백

평사원의 공백은 팀의 전력에 그리 큰 손실을 주진 않는다. 하지만 막내가 맡는 잡무는 자칫 소홀하기 쉬워 윗사람들로부터 한소리 듣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류회사에 다니는 유모 대리는 후배가 휴가를 가자 매일 아침 20분씩 일찍 출근했다. 탕비실의 티스푼을 씻어놓고 임원실에 커피믹스는 떨어지지 않았는지,주차권은 남아있는지 등을 챙기기 위해서다. 문제는 닷새째 되던 날 벌어졌다. 임원실 난초에 물 주는 것을 깜빡해 잎이 시들기 시작한 것.임원방에 잠깐 들른 부사장이 "난 하나 제대로 돌보지 않아 말라죽을 지경으로 만드냐"고 타박을 줬을 때 유 대리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후 난초들은 주 2회 물주기 당번 배치,영양제 주입 등 특급 대우를 받고 있다.

사원이 휴가를 갔을 때 대리가 처리해야 하는 일들은 대개 이런 것들이다. 프린터 잉크 갈아끼우기,전화 당겨 받기,부장의 디지털카메라를 컴퓨터에 연결해주기,하루 한번 우편물 받아오기,간식거리 채워넣기,영수증 처리하기,엑셀 함수 사용법 익히기 등등….

강유현/노경목/강경민 기자 yh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