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 칼럼] 아름다운 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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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으로 살던 이들, 외로움에 노욕…은퇴 후 새로운 삶 준비해야 깔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지금은 가야 할 때./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 나의 사랑.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형기 시인(1933~2005)의 대표작 '낙화(落花)'다. 1963년 시집'적막강산'에 실린 뒤 지금껏 많은 이에게 사랑받는 시는 가슴을 친다. 그러나 막상 '가야 할 때'를 아는 건 어렵다. 안다 해도 떠나긴 힘들다. 박수 칠 때 떠나라기에 떠나고 보니 몇 달 안 돼 전화 한 통 오지 않아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일반인도 그렇거늘 평생 갑(甲)으로 살던 이들은 더할 것이다. 관리,특히 고위 공무원을 지낸 이들은 그만두고 나면 주위에서 소홀히 대하는 것 같아 견디기 힘들다고 한다. 청렴하던 이들은 더 괴롭다는 말도 있다. 자신은 빈털터리인데 재직 중 부정부패에 연루됐던 이들은 떵떵거리고 사는 걸 보면 참담하다는 얘기다.
이러니 다들 물러나지 않으려 기를 쓰고 순순히 떠났던 사람까지 다시 한자리를 차지하려 백방으로 뛰거나 평소 음양으로 봐주면서 나중을 기약한다. 이들 외에도 한국 남성이 은퇴를 겁내는 이유는 간단하다. 평생 일만 하고 살다 보니 하던 일 외엔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다. 놀 줄도,집안 일을 거들 줄도 모른다.
갑이었던 이들은 심지어 대접받지 못하는 자리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조차 알지 못한다. 결국 하루 세 끼 집에서 해결하는 삼식이가 되기 십상이다. 무료하니 냉장고를 뒤져 유통기한 지난 식재료나 상한 음식을 꺼내 부인의 심사를 뒤집는다. 일할 수 없는 건 답답하고 남이 알아주지 않는 생활은 서글프기 짝이 없다.
나름대로 청렴하던 이가 뒤늦게 전관예우의 함정에 빠지거나 사소한 이익에 매달렸다 험한 일을 겪는 이유다. 퇴직 후 어디선가 임원으로 초빙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덜컥 맡았다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을 뒤집어쓰고 초라한 노년을 맞는 이들 역시 퇴직 후의 외로움과 고립감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다.
공자는'군자삼계(君子三戒)'로 '젊을 때의 색욕(色慾) 및 중년의 다툼과 함께 노년의 탐욕(貪慾)'을 꼽았다. 몸은 예전같지 않고 지난날의 포부는 사라져 회한만 남다 보면 명예와 의리는 사라지고 눈앞의 이익에 연연하게 된다는 것이다. 공자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노욕(老慾)은 지나치면 노추(老醜)가 된다.
미국에선 이대로 가면 베이비붐 세대가 아니라 베이비둠(doom · 파멸) 세대가 될지 모른다는 얘기가 나온다. 주택 가격 하락으로 시가보다 대출금이 더 많은 이른바 '깡통주택'을 지닌 이들이 상당수여서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하나HSBC생명이 SK마케팅&컴퍼니와 함께 20~50대 직장인 및 예비 은퇴자 1000명을 대상으로 공동 조사한 결과 82.3%가 노후 준비를 제대로 못한다고 답했다는 발표도 있다.
응답자 다수가 노후의 롤모델로 은퇴 후 부인과 함께 192개국을 여행한 이해욱 전 KT 대표와 정년 없이 일하는 배우 이순재 씨를 꼽았다지만 두 사람 모두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모델은 아니다. 준비 되지 않은 장수는 재앙이고, 화려했던 과거에 매달리는 노후는 불행 그 자체다.
은퇴 후 지방으로 내려간 지인 부부의 삶은 아름답고 따뜻하다. 맞벌이였던 이들은 겨울엔 경기도 일산의 작은 오피스텔에 살면서 가끔 해외여행도 하고, 봄부터 가을까진 시골집에서 잡초를 뽑고 나뭇가지를 치고 채소를 가꾼다.
남편은 색소폰을 배우는 한편 은퇴 전 익힌 이발 기술로 마을 노인들의 머리를 손질해주고, 부인은 이웃 초등생에게 공부를 가르친다. 또 서울과 일산의 지인들에게 부탁,재활용 의류를 모아 지역 어선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전달한다. 봄 가을로 아는 이들에게 지역 특산품인 소금을 부쳐주고 직접 만든 매실액도 나눠준다. 배는 쏙 들어가고 피부는 탱탱하고 표정은 마냥 환하다. 부럽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이형기 시인(1933~2005)의 대표작 '낙화(落花)'다. 1963년 시집'적막강산'에 실린 뒤 지금껏 많은 이에게 사랑받는 시는 가슴을 친다. 그러나 막상 '가야 할 때'를 아는 건 어렵다. 안다 해도 떠나긴 힘들다. 박수 칠 때 떠나라기에 떠나고 보니 몇 달 안 돼 전화 한 통 오지 않아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일반인도 그렇거늘 평생 갑(甲)으로 살던 이들은 더할 것이다. 관리,특히 고위 공무원을 지낸 이들은 그만두고 나면 주위에서 소홀히 대하는 것 같아 견디기 힘들다고 한다. 청렴하던 이들은 더 괴롭다는 말도 있다. 자신은 빈털터리인데 재직 중 부정부패에 연루됐던 이들은 떵떵거리고 사는 걸 보면 참담하다는 얘기다.
이러니 다들 물러나지 않으려 기를 쓰고 순순히 떠났던 사람까지 다시 한자리를 차지하려 백방으로 뛰거나 평소 음양으로 봐주면서 나중을 기약한다. 이들 외에도 한국 남성이 은퇴를 겁내는 이유는 간단하다. 평생 일만 하고 살다 보니 하던 일 외엔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다. 놀 줄도,집안 일을 거들 줄도 모른다.
갑이었던 이들은 심지어 대접받지 못하는 자리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조차 알지 못한다. 결국 하루 세 끼 집에서 해결하는 삼식이가 되기 십상이다. 무료하니 냉장고를 뒤져 유통기한 지난 식재료나 상한 음식을 꺼내 부인의 심사를 뒤집는다. 일할 수 없는 건 답답하고 남이 알아주지 않는 생활은 서글프기 짝이 없다.
나름대로 청렴하던 이가 뒤늦게 전관예우의 함정에 빠지거나 사소한 이익에 매달렸다 험한 일을 겪는 이유다. 퇴직 후 어디선가 임원으로 초빙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덜컥 맡았다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을 뒤집어쓰고 초라한 노년을 맞는 이들 역시 퇴직 후의 외로움과 고립감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다.
공자는'군자삼계(君子三戒)'로 '젊을 때의 색욕(色慾) 및 중년의 다툼과 함께 노년의 탐욕(貪慾)'을 꼽았다. 몸은 예전같지 않고 지난날의 포부는 사라져 회한만 남다 보면 명예와 의리는 사라지고 눈앞의 이익에 연연하게 된다는 것이다. 공자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노욕(老慾)은 지나치면 노추(老醜)가 된다.
미국에선 이대로 가면 베이비붐 세대가 아니라 베이비둠(doom · 파멸) 세대가 될지 모른다는 얘기가 나온다. 주택 가격 하락으로 시가보다 대출금이 더 많은 이른바 '깡통주택'을 지닌 이들이 상당수여서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하나HSBC생명이 SK마케팅&컴퍼니와 함께 20~50대 직장인 및 예비 은퇴자 1000명을 대상으로 공동 조사한 결과 82.3%가 노후 준비를 제대로 못한다고 답했다는 발표도 있다.
응답자 다수가 노후의 롤모델로 은퇴 후 부인과 함께 192개국을 여행한 이해욱 전 KT 대표와 정년 없이 일하는 배우 이순재 씨를 꼽았다지만 두 사람 모두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모델은 아니다. 준비 되지 않은 장수는 재앙이고, 화려했던 과거에 매달리는 노후는 불행 그 자체다.
은퇴 후 지방으로 내려간 지인 부부의 삶은 아름답고 따뜻하다. 맞벌이였던 이들은 겨울엔 경기도 일산의 작은 오피스텔에 살면서 가끔 해외여행도 하고, 봄부터 가을까진 시골집에서 잡초를 뽑고 나뭇가지를 치고 채소를 가꾼다.
남편은 색소폰을 배우는 한편 은퇴 전 익힌 이발 기술로 마을 노인들의 머리를 손질해주고, 부인은 이웃 초등생에게 공부를 가르친다. 또 서울과 일산의 지인들에게 부탁,재활용 의류를 모아 지역 어선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전달한다. 봄 가을로 아는 이들에게 지역 특산품인 소금을 부쳐주고 직접 만든 매실액도 나눠준다. 배는 쏙 들어가고 피부는 탱탱하고 표정은 마냥 환하다. 부럽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