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석 달간 하루 두세 시간만 자고 책을 읽었더니 통풍이 오더군요. 그래도 어쩝니까. 책을 읽어야죠."

오는 20일 출판전문 격주간지 《기획회의》 300호를 내는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53 · 사진).서울 마포구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는 "정말 죽기살기로 책을 읽었다"는 흔적들이 널려 있다. 그는 야전침대를 가리키며 "통풍 때문에 들여놓은 것인데 이젠 쓸 일이 없다"며 웃었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이제 잡지 발간을 그만두고 싶다'고 푸념한 적이 있어요. 출판계 선배가 무척 실망한 표정으로 말리더군요. 출판인들이 뭘 고민하고 어떤 트렌드가 형성되는지 잡지 속에 다 들어있어서 좋았다나요. 선배는 직원 면접 때 이 잡지를 보며 출판인의 꿈을 키웠다는 대학생 얘기도 해줬어요. 기다리는 분들이 있다는 생각에 책임감이 더 생기더군요. "

출판기획자 겸 평론가인 그는 1999년 2월 《기획회의》를 창간했다. 출판업계 소식과 편집자들의 서평,출판기획자들의 이야기 등을 담아 펴냈다. 외환위기 직후 부도를 맞은 책 도매유통사 송인서적을 위탁경영하던 시절 500만원을 투자받아 만든 '송인소식'이 이 잡지의 전신이다. 이후 2004년 《기획회의》로 이름을 바꾸고 300호까지 12년6개월여를 쉼없이 달려왔다.

300호 특별판에서는 최근 5년간 한 차례 이상 책을 낸 국내 저자 300명을 분석했다. 해외 서적과 시 · 소설 등 문학류는 제외하고 경제 · 인문 · 사회과학 등 10개 분야로 나눴다. 300호 발간을 기념해 '교육''20대''중국'을 주제로 한 단행본 3권도 동시에 내놓는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주제별로 30여권의 책을 추천하고 분석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세상을 읽는 통찰력을 제공하겠다는 생각이다. '앎과 삶 시리즈'라는 제목의 주제별 단행본 서평집 시리즈의 첫 세 권이다.

그는 올 상반기가 특히 바쁜 시기였다고 말했다. 1981년부터 30년간 국내 베스트셀러 통계를 바탕으로 한국 사회의 변화를 분석한 《베스트셀러 30년》(교보문고 펴냄)을 4월에 출간했다. 지난 2일 별세한 출판평론가 최성일 씨의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펴냄)도 최근 다시 내놓았다. 작년 10월 뇌종양이 재발한 최씨를 보면서 원래 다섯 권이었던 책을 한 권으로 묶은 것.철학자,문학가,역사학자,예술가 등 국내외 사상가 및 저술가 218명을 소개한 사전형태의 이 책은 인문학 입문자들과 출판계 종사자들 사이에서 뛰어난 길잡이책으로 호평받고 있다.

"그 친구 병문 안 갔을 때 해 줄 수 있는 게 그것뿐이더라고요. 출판평론가로 데뷔한 이래 13년간 썼던 책 중 대표작이잖아요. 기존 205편의 리뷰에 새 리뷰 10편을 보탰습니다. 판매 수익금은 유족에게 기증할 거예요. 책을 사랑했던 후배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네요. "

다들 책이 죽어간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그는 새로운 책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현대인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책을 봐야합니다. 디지털 검색은 뭘 정확히 알아야만 찾아볼 수 있지만 책은 애매하게 알아도 주변 것을 훑어보면서 관심을 확장할 수 있지요. 그게 바로 상상력입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로 책을 혁신한다면 출판시장은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