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미국 대선은 립스틱과 돼지 이야기로 뜨거웠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당시 경쟁자 존 매케인의 정책을 가리켜 "돼지가 립스틱을 발라도 돼지는 돼지"라고 비판했다. 립스틱과 돼지 속담이 유독 정치인들 세계에서 많이 회자되는 이유는 겉과 달리 잘못된 정책이 난무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박희태 국회의장이 '한국녹색과학기술원 법안'을 발의한다. 국회의장으로선 1954년 이기붕 씨 이후 57년 만이다. 녹색성장 연구와 고급인재 육성을 위한 '녹색과기원' 설립이 골자다. 평소 과학기술에 관심도 없던 국회의장이 갑작스럽게 법안 발의까지 하겠다는 배경이 궁금하지만 정치권은 다 알고 있는 눈치다. 박 의장이 지역구인 양산에 양산과학기술원을 설립하려 한다는 것이다. 선거가 확실히 다가온 모양이다. 국회의장까지 염치 불고할 정도면 모든 의원들이 지역구 표 획득을 위해 물불 안 가리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단군 이래 정치인들이 이렇게 과학을 떠든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과학기술원법이 넘쳐나고 있다. 창원과기원법,부산과기원법은 이미 발의된 상황이다. 또 다른 의원은 방사능 의과학분야 과기원도 만들자고 한다. 대구경북과기원도 있는데 우리는 왜 못 만드느냐는 논리다. 대구 · 경북 정치인들이 억지를 부리다시피해 만든 대경과기원이라는 것도 실은 그 전에 광주 · 호남 정치인들이 뭉쳐 탄생시킨 광주과기원을 그 모델로 삼았다. 최근 논란이 됐었던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도 고급인력 양성을 말하고 있고,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설립을 제안한 녹색기술센터도 결국 그 방향으로 갈 것이란 얘기가 나돈다.

아마 선거를 몇 번만 더하면 과학기술 대학원들이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설 것이다. 처음에는 연구와 고급인력 양성을 말하다 성과가 시원찮다 싶으면 슬그머니 학부까지 해달라는 것도 정해진 수순이다. 대학을 양산시켜 대학 전체를 부실화시키고 만 배경에는 어김없이 정치인들이 있다. 그런 정치인들이 이번에는 과학기술로 분칠을 해 과학기술과 교육의 동반 부실화를 초래하기로 작정한 것 같다.

모두가 정부예산을 전횡하는 이른바 포크배럴(pork barrel)성 사업들이고,선거 돼지(election pork)들의 전형적인 밥통 싸움이다. 정치인들은 표만 얻으면 그만이라는 계산이고,지역 주민들은 내 돈이 아닌 눈먼 돈,다른 사람들이 낸 세금을 정치인들이 전리품처럼 뺏어다주면 표를 찍어댄다. 정치인과 지역 주민들이 비용을 다 부담해야 한다면,그래서 경제성 · 타당성을 따져야 한다면 결코 공약으로 내세우지도,표를 찍지도 않았을 사업들이다.

자원 배분의 왜곡,비효율 등은 차라리 점잖은 비판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세계 30위 안 초일류 3개,세계 200위 안 연구중심대학 10개 육성이 목표라고 말한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나라에서 연구와 고급인력 양성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대학은 많아야 3~10개이고, 다른 대학은 교육만이라도 똑바로 시켰으면 좋겠다는 고백이다.

대학원이 이미 지방에서 붕괴되기 시작해 수도권으로 북상 중이다. 정치인들은 이런 현실에는 눈을 감아버린다. 벌써 조단위 예산을 훌쩍 넘는 정치권의 과기원 설립 경쟁은 공멸을 재촉할 뿐이고,국가 과학정책 · 인력정책이 뒤죽박죽이 되면 진짜 과학,진짜 과학인력들은 다 죽는다. 과학이 선거 돼지들의 립스틱으로 이용되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다.

안현실 논설위원 / 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