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명주식,재산 해외반출,허위서류 작성 등의 방법을 이용해 세금을 내지 않고 경영권을 자녀에게 물려준 기업체 사주와 고액 자산가들이 과세당국에 대거 적발됐다. 국세청은 올해 상반기 부당증여를 통해 편법적으로 경영권을 물려준 중견기업 사주와 고액 재산가 등 204명을 조사해 모두 4595억원을 추징했다고 12일 발표했다.

◆세금 없는 '부의 대물림' 조사

국세청은 이날 본청 대회의실에서 이현동 청장 주재로 전국 조사국장 회의를 열고 △세금 없는 부의 대물림 차단 △대기업에 대한 성실신고 검증 강화 △지속적인 역외탈세 근절 추진 등을 하반기 세무조사의 역점 과제로 정했다.

이 청장은 "그간 역외탈세 차단 등 많은 조사 성과를 올렸지만 국민의 기대 수준에는 아직 미흡하다"며 강도 높은 조사를 주문했다.

◆편법 증여 등에 과세

세금 안낸 '富 대물림' 4600억 추징
국세청에 따르면 서울에 있는 서비스업체 A회장은 1998년 계열사 임원 명의로 차명 관리하던 주식을 본인 명의로 실명전환했다. 당시 차명 주식을 실명으로 바꾸면 증여세가 면제된 점을 이용한 것이다.

하지만 A회장은 2004년 허위소송을 제기해 주식을 임원 명의로 다시 명의신탁했다. 이후 미성년자인 아들이 성년이 된 2008년 이 주식의 실제 주식 소유자가 아들인 것처럼 가짜로 주주명부를 만들어 735억원어치의 주식을 증여했다. 국세청은 A회장에게 증여세 620억원을 과세하고 검찰에 고발키로 했다.

유명 중견기업의 사주 B회장도 명의신탁을 활용해 편법으로 증여했다. 그는 회사를 설립하면서 본인 주식을 임원에게 명의신탁하고 이 중 일부를 자녀가 대주주인 회사에 수백억원이나 낮게 팔았다. 또 명의신탁 주식의 배당금 등으로 자금 출처가 면제된 무기명채권(일명 묻지마 채권) 55억원어치를 구입해 매각하고 이 돈으로 다시 지인 명의로 주식을 차명 취득하기도 했다. 총 편법증여액은 2500억원에 달해 970억원의 세금납부를 통보받았다.

해외에 세운 페이퍼컴퍼니와 서류상 이혼을 통해 상속세와 증여세를 탈루하다 적발된 사례도 있었다. 공인회계사 C씨는 2007~2008년 미국에 있는 아들에게 50억원을 증여하고도 아들 명의의 페이퍼컴퍼니에 투자한 것처럼 송금했다. 또 30년 이상 같이 살던 아내에게는 이혼하면 재산분할이 증여세 과세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점을 악용해 서류상 이혼하고 예금 80억원을 넘겨줬다.

◆무리한 과세 지적도

국세청은 올 하반기에도 탈세 개연성이 높은 고액자산가와 중견기업 사주를 중심으로 주식 부동산 등 전체 재산의 변동내역을 통합 분석해 성실납세 여부를 철저히 검증할 계획이다. 임환수 국세청 조사국장은 "변칙 상속 · 증여 혐의자에 대해서는 관련 기업까지 동시조사를 실시하는 등 철저히 과세해 편법적 부의 세습이 근절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국세청이 무리수를 두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편법 증여 · 상속과 역외탈세 수법에 대응하려면 보다 정교한 조사나 확실한 논리가 필요한데 이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국세청은 최근 역외탈세 혐의로 4101억원의 세금을 부과한 권혁 시도상선 회장의 홍콩계좌를 압류하려 했지만 홍콩법원은 "은행 계좌 동결 요구는 법적 근거가 없다"며 제동을 걸었다. 권 회장은 "국세청이 세금 추징을 강행하려는 것은 무리"라며 조세심판원에 세금 불복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카자흐스탄 '구리왕'차용규 씨에 대한 과세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 세무법인 관계자는 "차명주식이나 명의신탁,재산 해외반출 등은 갈수록 지능화 · 첨단화되고 있다"며 "불복소송이 제기되지 않을 만큼 확실한 증거를 잡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명의신탁

주식 부동산 등의 재산을 자신의 이름이 아닌 제3자 명의로 등재한 뒤 실질소유권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일제시대 때 종중(宗中)재산의 위탁관리 등을 인정하기 위해 우리나라에서만 허용되는 당사자 간의 계약관행이었지만 1990년대 부동산등기특별조치법과 금융실명제법이 제정되면서 금지됐다.

강동균 기자 kd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