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종종 혼돈에 빠진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중우정치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급기야 정치대중이 전면에 부상하면서 다른 쪽 극단인 전체주의를 향해 질주하기조차 했다. 21세기도 마찬가지다. 국가 부채의 누적,정치 리더십의 실종은 거의 모든 국가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이다. 남유럽 돼지국가(PIGS)들의 상황이나,여야가 극한 대립을 벌이고 있는 미국,심각한 재정난에 봉착한 일본이 그런 경우다. 한국도 포퓰리즘으로 끌려들어가고 있다.

정치가 국가 이익의 우선순위를 판단하고 공적 사안에 대한 게임의 규칙을 정하는 장치라기보다는 국민에게 꿀물과 사탕을 선사하고 마약을 제공하는 그런 절차로 전락한 것을 우리는 민주주의의 실패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세계 금융위기나 국가 파산의 진정한 원인이다. 선거 절차가 누가 더 큰 선심을 베풀 것인지를 경매 부치는 절차로 타락할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숙고(熟考)하는 시민들의 질서정연한 민주주의는 과연 복권될 것인가.

1. 노인 천국, 청년 지옥인 남유럽 국가들

[사설] 복지함정 빠진 위기의 대중 민주주의
지구촌 복지병의 진원지는 PIGS로 불리는 남유럽 국가들이다. 특히 최근엔 이탈리아 문제가 급부상하면서 글로벌 시장도 휘청거리고 있다. 유로존 내 세 번째 경제대국인 이탈리아의 재정위기가 현실화되면 유로존 자체가 붕괴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이탈리아 재정적자 규모는 지난해 GDP의 4.6%로 다른 PIGS 국가만큼 심각하지는 않다.

하지만 올해 만기가 돌아오는 정부부채만 1200억유로로 유럽 최대 경제국인 독일보다 두 배나 많다. 5년 안에 갚아야 할 정부 빚은 무려 9000억유로다. 이는 '노인 천국, 청년 지옥'으로 불리는 퍼주기식 복지의 결과다. 이탈리아는 소득의 40% 이상을 세금으로 내고 은퇴 후엔 연금 등 각종 혜택으로 돌려받는 전형적인 고부담, 고복지 국가다. 지금의 노인들에겐 천국 같지만 젊은이들은 일할 의욕도 없고 일자리 구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연금 재정 고갈로 그들이 노인이 될 때는 지금과 같은 노후를 기대할 수도 없다.

'놀고 먹기' 좋아하는 PIGS 국가 공통의 문제점을 이탈리아도 고스란히 갖고 있는 셈이다. PIGS의 고통은 민영화 등 다양한 형태의 연금개혁과 세제개편 등을 통해 퍼주기식 복지에서 선별적 복지로 일찌감치 돌아선 독일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과 좋은 대조를 보인다. 스웨덴(5.4%) 독일(3.6%) 등 북유럽 국가들의 경제성장률이 높고 재정 역시 안정적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무조건적인 복지보다는 시장경쟁을 고취하는 방향으로 꾸준히 제도를 개혁한 결과다. 결국 지금 남유럽 국가들의 위기는 필연적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돼지들(PIGS)로 불리며 조롱거리가 된 남유럽이다.

2. 부도 직면한 4만 달러의 미국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결국 노인 건강보험 등 복지지출을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의회로부터 정부 부채한도를 늘려 받기 위해서다. 오바마가 민주당의 극력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인 의료보장비를 삭감하겠다고 약속한 것은 미 정부의 재정위기의 심각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미국 재정적자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지금은 빚을 내서 빚을 갚는 지경이 돼버렸다. 세수가 세출을 도저히 쫓아가지 못하면서 이미 14조2940억달러의 부채한도를 모두 소진한 상태다. 올 회계연도(2010년 10월~2011년 9월)에는 연간 재정적자가 1조6450억달러로 다시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할 전망이다. 다음달 2일까지 한도를 확대하지 않으면 국채 이자조차 지급하지 못하는 디폴트(채무불이행)에 빠질 것이란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재정사정이 이렇게까지 악화된 것은 정부가 지출하는 노인 및 서민층 의료보험(메디케어,메디케이드)과 각종 연금을 포함한 사회보장비 지출 부담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GDP에서 차지하는 정부의 지출비중은 2001년 18.2%에서 2009년 24.7%로 높아졌지만 이 증가분의 절반 정도가 복지지출로 나가버렸다. 무리한 복지가 세계최대의 경제대국을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물론 미국이 부도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은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이 4만7275달러로 우리나라(2만759달러)의 두 배를 훨씬 넘는다. 법인세율도 35%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미국의 현실은 아무리 부국이라도 세금으로는 결코 복지를 감당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웅변한다.

3. 나라살림 만신창이 된 일본

국가부채는 GDP의 2배로 세계 1위,국민 4명 중 1명이 65세 이상 노인인 세계 최고령국가,어린이(15세 이하) 비율은 13.1%로 사상 최저이면서 인구가 줄어드는 나라.바로 일본의 현주소다. 일본은 80년대만 해도 세계 최고의 제조업 경쟁력을 토대로 미국마저 제칠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거품 붕괴 후 잃어버린 20년을 겪으면서 재정은 만신창이가 됐고,지금은 세금 올리는 것 외엔 속수무책인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일본의 몰락 원인은 눈앞에 닥친 저출산 · 고령화를 무시한 채 서둘러 교육 의료 등 사회보장지출을 대폭 확대해 복지의 덫에 걸린 데 있다. 인구가 늘고 생산활동이 왕성하던 60~70년대 고성장기에 짜여진 복지체계를,성장이 둔화되고 저출산 · 고령화가 급진전된 90년대 들어서도 전혀 손대지 않았던 결과다. 표를 의식한 정치권이 근본적인 복지개혁을 장기간 방치한 탓이다. 결국 세입은 줄어드는 반면 고령화에 따른 복지지출 확대로 세출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추세가 마치 악어가 입을 벌린 꼴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2015년이면 베이비부머가 65세가 돼 제2의 재정파탄을 예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 국민의 체감 복지수준은 낮기만 하다. 1인당 소득 4만2000달러에 달하는 부국에서 해마다 3만2000명이 고독사하는 판이다. 정치 포퓰리즘에 빠져 고비용 저효율 복지로 치달은 결과다. 한국은 거의 모든 면에서 일본을 추격해왔지만 복지의 덫에 걸린 정치만은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