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온 국민의 관심사다. 그러면서 냉소와 불신,혐오의 대상이다. 국민들이 정치권을 최고로 부패한 집단이자,개혁돼야 할 첫째 순위로 손꼽지만 가장 개혁이 이뤄지지 않는 비효율적 집단 또한 정치권이다. 갈수록 국민으로부터 멀어지고 손가락질 받는데도 공해 수준의 정치과잉이 국민들을 더 불편하게 만드는 악순환이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닌 모양이다. 영국의 정치과학자 콜린 헤이가 쓴 《왜 우리는 정치를 싫어할까(Why we hate politics?)》를 인용할 만하다. 영국 등 선진국들의 정치불신에 따른 선거 투표율 하락,이로 인한 정치위기에 대한 분석이다. 그는 대의민주주의에 기반한 정치가 기본적으로 유권자들의 기대의 산물이자 경제와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상위 개념으로서 집단선(集團善)이어야 하지만 그것과 거꾸로 가는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정치인들은 대체로 사회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실패하고,그들에게 부여된 정치적 수단을 자신의 사익(私益)을 위해 남용한다는 것이 그 결론이다. 유권자들 또한 정치적 필요에 따른 정책 집행이 대부분 세금을 엉뚱한 곳에 낭비하면서 국민 다수가 아닌 특정 소수의 이득으로 이어진다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 현실과도 꼭 들어맞는 얘기다. 수많은 한국 유권자들이 정치를 혐오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정치 공급자들은 소비자인 유권자가 무엇을 원하는지,좋은 정치상품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고 그저 제몫 챙기기에만 눈멀어 있다.

정치가 한낱 포퓰리즘을 왜곡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한 탓이다. 대중영합이 정치의 기본 바탕이니 그 자체를 악(惡)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정치인 모두 포퓰리스트의 한계를 갖고 있다. 문제는 대중의 참된 요구를 지향해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고 사회개혁을 통한 국가 발전의 동력으로 삼는 이상적(理想的) 포퓰리즘은 현실에 없다는 점이다. 포퓰리즘은 겉으로 국민 다수를 팔았지만,실상은 정치인 그들의 이해에 관계되는 소수에만 매몰된 퇴행적이고 폐쇄적 야합(野合)으로 흘렀다. 공익의 가치는 무시되고 그때 그때 유리한 쪽에 붙는 정치적 기회주의가 실체였다.

지금 우리 정치가 그저 '무조건 공평,퍼주기 복지,누가 서민인지 모르는 친서민'의 개념없는 상태에 빠진 현상도 다르지 않다. 국가자원 배분의 효율성과 생산성,어디에서 어떻게 재원을 마련해야 할지는 알 바 아니다. 정치인들에게는 선심을 베풀 수 있다면 그게 전부다. 하지만 국민 모두를 위한다는 것은 허울이고,그런 정치가 만들어 내는 정책은 대개 정치인 자신의 표가 되는 제한적 집단의 요구이자,그들을 우선 수혜대상으로 삼는 사적 이익의 도구다. 공공정책의 선택에서 전제돼야 할 합리성과 사회적 필요성,사회 구성원 전체의 편익은 설 자리가 없다.

이 같은 정치인들의 오도(誤導)된 포퓰리즘이 바로 '포크배럴(pork barrel)'이다. 모든 국민으로부터 걷은 세금이 실제로는 그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있는 특정 집단의 이득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 의회정치의 구태를 비판하는 말이지만 요즘 우리나라 정치판은 그 이상이다. 나라 곳간이야 파탄나든 말든 조금이라도 표가 될까 싶어 가리지 않고 사탕발림의 '무상'과 '반값'정책을 쏟아내기 바쁘다. 그런데도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의 포크배럴 한마디를 두고 뜻을 알 만한 의원님들이 자신들을 '돼지'로 모욕했다며 흥분하는 모습은 코미디다.

이제 야당도 아닌 집권 여당까지 그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 국정운영의 주체인 여당의 대표가 스스로 포퓰리즘을 내세우는 것도 어이없지만,보수적 가치의 '우파'라는 수식어를 양립할 수 없는 포퓰리즘에 끌어다 붙인 언어조합이야말로 말장난이다. 현실정치의 포퓰리즘에는 감성적 충동만 있을 뿐 합리적 정책논리,이성적 토론이 없다. 국가와 국민을 핑계삼아 정치인 그들의 이득을 챙기려는 행태만 존재한다. 정치가 자꾸만 국민들로부터 미움받는 이유다.

추창근 기획심의실장ㆍ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