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연극을 공부하고 단역 배우로 출연했던 하림은 룸살롱의 '삐끼'이자 PC방에서 게임에 몰두하는 탈북자 출신 젊은이.보잘것없는 현실과 달리 온라인 세상에서는 거대한 혁명을 이끈 무사 '쿠사나기'로 통한다.

공부나 취업,연애도 제대로 못하는 스물아홉 살의 철수는 가족과 사회로부터 '불량품' 취급받는 인물.표준규격에 미치지 못하는 기능을 갖춘 것인지 충전이 끝나지 않은 탓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어 답답하다.

신인작가 두 명이 소외된 젊은이들을 그린 장편소설을 나란히 내놨다. 상금 1억원의 '2011 세계문학상'을 받은 강희진 씨(47)가 《유령》(은행나무)을,'2011 오늘의 작가상' 수상자인 전석순 씨(29)가 《철수 사용 설명서》(민음사)를 펴냈다.

《유령》은 다큐멘터리 방송작가 출신인 강씨의 등단작이다. 2004년 유명 온라인 게임인 '리니지2'의 '바츠 해방 전쟁'이라는 소재를 차용해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북한(과거)과 남한(현재),용의자와 범죄자의 경계에 선 탈북자들의 얘기를 그렸다. 온라인 세상에서 높은 레벨을 쌓은 게이머들이 강력한 무기와 힘을 바탕으로 동맹을 맺고 세금을 매기는 등 폭정을 펴자 낮은 레벨인 '서민' 게이머들이 전쟁을 일으켜 승리했다는 얘기를 소설 속 중요한 장치로 사용했다.

남쪽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게임 중독자나 술집 여급으로 전락한 탈북자들은 현실 속 '루저'지만 가상 세계에선 영웅이다. 탈북 과정에서 겪은 트라우마로 기억과 정체성을 잃어가는 하림은 탈북자들이 주로 모이는 백석공원에서 벌어진 한 탈북자의 자살과 의문의 신체 훼손 사건에 연루되면서 끊임없는 혼돈에 휩싸인다.

탈북자를 거의 만나본 적이 없다는 강씨는 10년치에 달하는 탈북자 관련 방송 프로그램과 각종 인터뷰를 보며 연구했다. 온라인 게임도 할 줄 몰라 직접 배우고 논문을 찾으며 조사했다.

"처음에 탈북자들은 한국이 천국인 줄 알고 옵니다. 집과 정착금을 주기 때문이죠.그런데 와 보면 노동 강도가 센 나라잖아요. 여기선 상대적 소외감과 무관심,절망감,극심한 경쟁에 시달리죠.소수자인 탈북자를 통해 타자에게 배타적이고 무관심한 우리 사회를 되비춰보고 싶었습니다. "

전석순 씨의 《철수 사용 설명서》는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스트레스와 열등감을 느껴야 하는 대한민국의 보통 청년 '철수'를 가볍고 유쾌한 방식으로 풍자한 소설이다. 지방국립대를 졸업한 후 좀처럼 취직을 하지 못하는 철수는 스팀 기능이 없는 다리미나 얼음을 못 만드는 정수기 쯤으로 치부된다.

소설은 가전제품 설명서 양식을 그대로 가져와 철수의 제품 규격과 사양 설명서,제품 보증서를 풀어낸다. 스펙쌓기 경쟁에서 조금만 밀려도 '오류가 있는 제품'이나 '쓸모없는 구형'으로 인식하는 현대 사회에 일침을 가한다. '취업 모드''연애 모드''학습 모드''소비자 피해 보상 기준 안내' 등 각 장의 소제목이 재미있다.

전씨는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제품 매뉴얼 형식을 차용했지만 소설의 40%가량에는 대학(명지대 문예창작과) 졸업 후 백수생활을 했던 저의 경험담이 녹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마치 20대 청춘들이 사회 탓만 하는 것처럼 느끼지 말았으면 좋겠다"며 "마지막에 철수가 자신의 사용 설명서를 스스로에게 먼저 읽히는 대목은 20대에게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택한 장치"라고 설명했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