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전 인물열전] (60) 몽염(蒙恬), 만리장성 쌓으며 地脈 끊은 '업보'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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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君만 바라보다 비참한 최후 맞아
중국을 상징하는 코드인 만리장성은 중국인의 자부심의 상징처럼 보이지만,북방 유목민과의 끊임없는 전쟁과 이민족과의 문화적 격절을 규정하는 흉물스런 구조물이기도 하다. 바로 그 만리장성을 쌓은 인물이 몽염(蒙恬)이다.
사마천에 의하면 몽염의 조상은 제나라 사람이며 할아버지(몽오)는 뛰어난 장수로서 조나라 성읍을 37개나 빼앗는 공을 세웠다. 아버지(몽무)도 진나라 부장군이 되어 초나라를 쳐서 초나라 장수 항연(項燕)을 죽였다. 무인의 집안에서 자란 몽염은 법률을 배워 소송 문건을 처리하는 일을 좋아했다. 몽염에게는 의(毅)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는 법이론에만 정통했다.
몽염은 진시황의 명을 받아 군사 30만명을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융적(戎狄)을 쫓아 버리고 하남을 차지하여 장성을 쌓는 임무를 맡게 됐다. 그는 장성을 쌓으면서 지형과 산세의 기복에 따라 요새를 만들었으며 1만여리나 되는 기나긴 성벽을 구축했다. 그런 후 황하를 건너 양산(陽山)산맥을 차지하고 흉노의 근거지인 북쪽으로 치고 올라갔다. 몽염의 이런 충정에는 적어도 시황제의 강력한 성원과 지지가 있었다. 몽염의 후광을 입은 그의 동생 몽의도 지위가 상경에까지 올라가게 됐다.
그러나 몽염의 운명은 시황제가 사구(沙丘)에서 50세의 나이로 객사하면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몽염에게 숨을 죽이고 있던 자들은 어느 틈에 이 두 형제의 공공의 적이 돼 버렸다. 특히 환관 조고(趙高)가 그러했다. 조고는 몽의와 깊은 악연이 있었으니 조고가 대죄를 지었을 때 생전의 시황제는 몽의에게 죄목을 물었는데,몽의의 답은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고는 당연히 환관의 명부에서 삭제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운명에 처해졌으나 시황제는 조고의 뛰어난 능력을 높이 사 사형을 면하게 하고 그의 관직과 작위를 회복시켜 주었던 것이다.
절대 권력자가 없는 궁궐은 조고의 천하가 돼 버렸다. 그는 시황제의 유서를 위조하면서 "장군 몽염은 (황제의 맏아들) 부소와 함께 밖에 있으면서 부소를 바로잡지 못했으며,마땅히 부소가 꾀하는 바를 알았을 터이다. 신하로서 충성하지 못하였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명하며,군사는 비장(裨將) 왕이(王離)에게 맡기도록 하라"(사기 이사열전)는 명을 내린다. 부소가 자결했으나 몽염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죽기를 거부하자 양주의 옥에 가두어 버린다.
몽염은 이제 과거의 막강한 실권자가 아니었고 조고,라이벌인 이사(李斯) 등의 모든 행동거지를 살펴야 하는 궁색한 처지가 됐다. 아니나 다를까. 몽염 제거에 실패한 조고는 먼저 몽의를 제거하고자 황자 호해에게 "신이 듣건대 선제(시황제)께서는 황자(호해)의 현명함을 들어 태자로 세우려 한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몽의가 '옳지 않습니다'라고 간했다고 합니다"(몽염열전)라고 음해하면서 죽여야 한다고 했다. 호해는 참소를 핑계거리로 삼아 즉시 몽의를 대(代) 땅의 옥에 가둔 뒤 결국 어사대부를 보내 죽음을 내린다.
몽염에게도 죽음의 그림자는 즉시 다가왔다.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잘못도 없이 죽어야 한단 말인가"라고 한탄하면서 만리장성을 쌓을 때 지맥을 끊어놓은 것이 업보로 다가왔다는 한을 남기며 감옥에서 약을 먹고 죽는다. 몽염은 오직 진시황 한 명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걸었고 수많은 백성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만리장성을 완성했다. 그러나 진시황은 몽염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기에 몽염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호해도 조고도 아니고,그의 라이벌도 아니었다. 몰락의 근본 원인은 몽염 자신의 판단착오가 아니었을까.
김원중 <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
사마천에 의하면 몽염의 조상은 제나라 사람이며 할아버지(몽오)는 뛰어난 장수로서 조나라 성읍을 37개나 빼앗는 공을 세웠다. 아버지(몽무)도 진나라 부장군이 되어 초나라를 쳐서 초나라 장수 항연(項燕)을 죽였다. 무인의 집안에서 자란 몽염은 법률을 배워 소송 문건을 처리하는 일을 좋아했다. 몽염에게는 의(毅)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는 법이론에만 정통했다.
몽염은 진시황의 명을 받아 군사 30만명을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융적(戎狄)을 쫓아 버리고 하남을 차지하여 장성을 쌓는 임무를 맡게 됐다. 그는 장성을 쌓으면서 지형과 산세의 기복에 따라 요새를 만들었으며 1만여리나 되는 기나긴 성벽을 구축했다. 그런 후 황하를 건너 양산(陽山)산맥을 차지하고 흉노의 근거지인 북쪽으로 치고 올라갔다. 몽염의 이런 충정에는 적어도 시황제의 강력한 성원과 지지가 있었다. 몽염의 후광을 입은 그의 동생 몽의도 지위가 상경에까지 올라가게 됐다.
그러나 몽염의 운명은 시황제가 사구(沙丘)에서 50세의 나이로 객사하면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몽염에게 숨을 죽이고 있던 자들은 어느 틈에 이 두 형제의 공공의 적이 돼 버렸다. 특히 환관 조고(趙高)가 그러했다. 조고는 몽의와 깊은 악연이 있었으니 조고가 대죄를 지었을 때 생전의 시황제는 몽의에게 죄목을 물었는데,몽의의 답은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고는 당연히 환관의 명부에서 삭제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운명에 처해졌으나 시황제는 조고의 뛰어난 능력을 높이 사 사형을 면하게 하고 그의 관직과 작위를 회복시켜 주었던 것이다.
절대 권력자가 없는 궁궐은 조고의 천하가 돼 버렸다. 그는 시황제의 유서를 위조하면서 "장군 몽염은 (황제의 맏아들) 부소와 함께 밖에 있으면서 부소를 바로잡지 못했으며,마땅히 부소가 꾀하는 바를 알았을 터이다. 신하로서 충성하지 못하였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명하며,군사는 비장(裨將) 왕이(王離)에게 맡기도록 하라"(사기 이사열전)는 명을 내린다. 부소가 자결했으나 몽염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죽기를 거부하자 양주의 옥에 가두어 버린다.
몽염은 이제 과거의 막강한 실권자가 아니었고 조고,라이벌인 이사(李斯) 등의 모든 행동거지를 살펴야 하는 궁색한 처지가 됐다. 아니나 다를까. 몽염 제거에 실패한 조고는 먼저 몽의를 제거하고자 황자 호해에게 "신이 듣건대 선제(시황제)께서는 황자(호해)의 현명함을 들어 태자로 세우려 한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몽의가 '옳지 않습니다'라고 간했다고 합니다"(몽염열전)라고 음해하면서 죽여야 한다고 했다. 호해는 참소를 핑계거리로 삼아 즉시 몽의를 대(代) 땅의 옥에 가둔 뒤 결국 어사대부를 보내 죽음을 내린다.
몽염에게도 죽음의 그림자는 즉시 다가왔다.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잘못도 없이 죽어야 한단 말인가"라고 한탄하면서 만리장성을 쌓을 때 지맥을 끊어놓은 것이 업보로 다가왔다는 한을 남기며 감옥에서 약을 먹고 죽는다. 몽염은 오직 진시황 한 명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걸었고 수많은 백성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만리장성을 완성했다. 그러나 진시황은 몽염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기에 몽염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호해도 조고도 아니고,그의 라이벌도 아니었다. 몰락의 근본 원인은 몽염 자신의 판단착오가 아니었을까.
김원중 <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