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이탈리아語 '방카'서 유래…담보대출·합자회사의 효시
위기의 진원지
유럽 금융계 지배 '돈줄' 장악, 투기적 투자로 파산…쇠퇴의 길
최근 재정위기 전염 우려로 글로벌 금융시장을 요동치게 한 이탈리아는 서구 금융 시스템의 산실(産室)과 같은 곳이다. 은행이란 뜻의 영어 '뱅크(bank)'는 피렌체 은행가들이 돈을 빌려주기 위해 앉았던 긴 의자(벤치)를 지칭하는 이탈리아어 '방카(banca)'에서 유래했다. 복식부기와 담보대출,합자회사의 '고향'도 이탈리아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유럽 경제사 초기 단계부터 '투기적' 대출과 '비생산적 사치'로 연쇄부도와 금융위기를 반복하며 유럽 경제를 잇따라 위기에 몰아 넣었던 어두운 역사도 있다. 최근 불거진 이탈리아발(發) 글로벌 경제위기는 과거사에서 결코 낯선 장면이 아니다.
◆금융의 산실이자 위기의 진원지
피렌체 등 북부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지역 사람들은 '이자 수취'를 금지한 중세교회의 제약을 넘어서며 금융업을 발전시켜 나갔다. 12세기에 유럽 최초의 예금은행(deposit banks)을 만들었고 이어 담보대출 개념을 창출했다. 이에 따라 담보대출,전당포 관련 업종에 '롬바르드'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쓰였다.
피렌체 뱅커들은 일찍부터 국제금융에 눈을 떠 로마와 베네치아 제노바 밀라노 등 이탈리아 각 지역뿐 아니라 바르셀로나 제네바 브뤼주 런던 리옹 아비뇽 등으로 진출하며 전 유럽의 '돈줄'을 장악했다. 14세기 피렌체의 양대 금융 가문인 바르디와 페루치는 유럽 금융계를 지배했다. 1397년 설립된 메디치은행도 명성을 날렸다.
하지만 초기부터 이탈리아 은행들은 고수익을 노린 투기적 투자로 적잖은 위험을 자초했다. 지금으로 치면 국가신용등급이 낮은 일부 유럽 왕실에 거액을 대출했다가 돈을 떼이면서 연쇄부도로 이어진 것이다. 문제가 커지자 1311년 프랑스의 필리프 4세는 이탈리아 은행가들을 추방하고 자산을 압류했다.
특히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가 거액의 이탈리아 대출금을 잇따라 디폴트(채무 불이행)로 처리하면서 바르디 가문(1353년)과 페루치 가문(1374년)을 파산시킨 것은 큰 파장을 몰고왔다. 브뤼주 리옹 런던 등에서 거액을 무절제하게 대출한 메디치은행도 1494년 파산했다. 여기에 1619~1622년 신성로마제국 각지에서 화폐 발행 급증으로 발생한 외환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은행들이 줄도산하면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과도한 복지와 사치도 문제
찰스 킨들버거 전 MIT 교수는 이탈리아 경제 쇠락의 원인 중 하나로 금융위기와 함께 사치 풍조가 만연하고 과도한 '평등주의'로 경쟁력을 상실한 점 등을 꼽았다.
예컨대 해상무역국 베네치아에선 고임금을 노린 선원의 해외 유출이 심해졌고 1550년대부터 1590년대까지 선원 임금이 두 배로 올랐으나 선원난은 해소되지 않았다. 선원들은 흰담비 가죽으로 만든 고급 옷을 입으면서도 실제 근무 시간은 계속 줄였다. 당시 이탈리아 배들은 항해 기간에 상관없이 선원들에게 매일 급료를 지불했다.
베네치아 피렌체 등은 무역처럼 힘들고 위험한 일보다는 안전한 '돈놀이'로 사업의 축이 바뀌었다. 상인들은 해운업에서 자금을 빼 주택과 점포 같은 부동산에 투자했다. 교외 별장과 예술품 등 과시성 사치산업이 발전하면서 베네치아는 '향락의 본산(sede principalissima del piacere)'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별칭까지 얻었다. 이탈리아를 둘러싼 고위험 · 투기적 금융 거래와 과도한 복지,분수를 넘는 지출에 따른 경제위기는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없이 반복되고 있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