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장마당에서 운동화 등이 거래되는 '겉모습'만 보고 북한에 시장경제가 작동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섣부른 일이다. "(최수영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한국경제신문과 한국수출입은행,통일연구원은 지난 15일 서울 여의도 수출입은행 본사에서 '북한 시장경제의 현주소와 발전 전망'을 주제로 '2011 북한경제 국제세미나'를 공동 개최했다.

국내 · 외 주요 북한 연구자들이 대거 참석한 이 세미나에서 참가자들 중 상당수는 "북한 경제가 일부 시장화된 것은 맞지만 국가의 힘이 강하게 억누르고 있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탈북자 · 언론 등을 통해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시장의 역할이 크지 않다는 얘기다.

이들은 "북한 시장경제의 안착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한국이 북한 내 금융회사 설립을 지원하는 등 노력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시장은 있지만 기업이 없다"

발표자들은 북한 경제에서 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과대 평가됐을 가능성을 지적했다. 최 연구위원은 "지난 10년간 북한의 상업 · 유통 부문에 개인이나 기업의 진출이 확대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시장 수요에 부응하는 새로운 생산기업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시장에서 화폐로 물건이 거래되곤 있지만,그 상품은 거의 모두 중국산이거나 국영기업이 빼돌린 물품이라는 얘기다.

최 연구위원은 "가내수공업 수준의 소기업이 있긴 하지만 '의미 있는 수준'으로 개인이 판단해서 물자를 동원해 생산하는 것은 여전히 매우 어렵다"고 설명했다. 정치적 탄압을 받을 가능성이 높을 뿐 아니라 필요한 물자를 구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이다.

양문수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도 "북한의 시장은 국내 자원이 고갈돼 있어 생산보다는 유통,특히 무역의 발달에 의존하고 있으며 뚜렷한 생산력 증대를 수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병연 서울대 교수는 "북한 정부는 시장의 피를 빨아먹는 조직"이라며 "시장에서 발생한 잉여가 국가에 의해 수탈당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탈북자들에 관해 오랫동안 연구한 스티븐 해거드 미국 UC샌디에이고 교수는 2000년대 중반 이후 시장을 통제하기 위해 북한 정부가 시도한 다양한 방법을 소개했다. 해거드 교수는 "2005년 8월 부활한 식량배급제도(PDS),40세 이상 여성은 종합시장에서 거래할 수 없도록 하는 2007년 '반시장 운동',2009년 화폐개혁 등은 시장을 통제하기 위한 장치들"이라며 "북한 정권은 공공 부문이 붕괴되고 있는 와중에도 가계들이 '숨만 쉴 정도의' 시장공간을 허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피터 벡 일본 게이오대 교수도 "북한 경제가 상당히 시장화된 것은 사실이나 시장경제로의 전환은 아직 미완상태"라고 평가했다.

◆"북한 정부,인플레 의도했을 수도"

북한 정부가 2009년 12월 단행한 '몰수식 화폐개혁'의 효과에 대해서는 참가자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렸다. 가구당 일정액에 대해 구권 100장을 신권 1장으로 교환한 이 화폐개혁은 암시장에서 형성된 부를 일거에 빼앗는 효과가 있었다.

일부 참가자들이 화폐개혁으로 인플레가 유발됐지만 이는 북한 정부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란 분석을 내놔 눈길을 끌었다. 홍익표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전문연구원은 "북한이 화폐개혁 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었다는 이유로 실패로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그는 "정부의 시장관리 능력이 강화됐고 무엇보다도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홍 연구원은 "일본의 총련 관계자들이 작년 방북했을 때 북한 경제관료 리기성이 이들에게 화폐개혁 효과와 인플레이션에 관해 설명하며 '결코 재정적자를 늘리지 않겠다'고 언급했다"고 전했다. 북한 정부가 '소기의 목표'를 달성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면 루디거 프랑크 오스트리아 빈대 교수는 "작년 유럽연합(EU)의 초청을 받은 북한 사람들의 교육을 담당했는데 인플레이션에 대해 굉장히 많은 질문을 던지며 걱정하고 있었다"며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고 말했다.

◆"북한 금융기관 설립 지원해야"

북한의 시장경제를 활성화하고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한국이 맡아야 할 역할에 대해서도 다양한 논의가 이뤄졌다.

프랑크 교수는 금융회사 설립 지원을 주장했다. 그는 "북한 경제가 화폐화(monetization)하고 있지만,더 안정적이고 전환 가능한 화폐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북한의 화폐화 · 시장화를 지원하기 위해 한국 등에서 북한에 여러 금융회사들을 설립해 시장경제를 지원하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와 관련해 양 교수는 "상업은행 설립 등으로 중앙은행 단일 금융기관 체제를 복수 체제로 바꾸고,예금 보장과 기업 간 현금 거래 및 가계대출 등의 기능이 들어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해거드 교수는 "아시아개발은행(ADB) 세계은행(WB) 등이 북한에 진출해 국제사회의 룰에 따라 지원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크 교수도 "북한을 '특별대우'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라고 거들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한 전직 통일부 관료는 "지금껏 노력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북한이 받아들이지 않아 성과가 없었던 것"이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