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 가면 너도나도 "흑기사 좀 해주세용"
화장실은 한 층 밑으로…야유회 가면 짐꾼 노릇
"여자들 화해시키느니 유럽을 정복하겠다" 나폴레옹이 이해된다
"물론, 장점도 있지요"
여자들 생각 읽는 능력 생겨…말투 바뀌고 성격 부드러워져…술자리 줄어 저녁시간 활용도
"그 녀석,생긴 게 진짜 예술이란 말이야."
정수기 · 비데 업체인 웅진코웨이의 가정 방문원인 김충성 코닥(여성 방문원은 '코디').김 코닥은 요즘 인기 TV 드라마 '씨티헌터'에 푹빠져 있다. 뉴스와 스포츠 중계만 보던 그가 드라마를 찾게 된 것은 이 직장에 오게 되면서부터다. 이전 직장에서는 자칭 '터프가이'였다. 성격도 다혈질이고 급한 편이었다. 하지만 코닥 생활 6년 반을 지낸 지금은 부드러운 말투와 섬세함에 아내가 '당신 누구냐'며 놀릴 정도다.
김씨를 '짐승남'에서 '초식남'으로 바꿔놓은 것은 그의 직업이다. 그는 하루 대부분을 여성들을 대하면서 보낸다. 웅진코웨이 전체 코디 1300명 중 남자인 코닥은 120여명에 불과하다. 그가 속한 분당지점은 23명 중 그를 포함해 단 2명만 남자다. 그의 고객 또한 대부분 가정주부들이다.
김 코닥처럼 여성들에 둘러싸여 사는 직장인들도 적지 않다. 여초 직장에 다니는 '청일점'직장인들의 남다른 애환을 살펴본다.
◆당신들,내가 남자인거 알아?
모 홈쇼핑 업체 김모 과장은 회식이 괴롭다. 회식 자리에서 폭탄주가 여러 잔 돌아가면 여성 직원들이 "김과장님,흑기사좀 해줘요"라며 술잔을 넘겨오기 때문이다. 평소에 술을 즐겨하는 편이 아닌데도 회식자리에서는 항상 과음을 하게 된다. 그의 책상 서랍에는 숙취해소 음료는 필수품으로 자리잡고 있다.
같은 홈쇼핑 업체의 쇼핑 호스트 박모씨는 얼마 전 결혼정보 회사와 상담을 받다가 그리 유쾌하지 않은 역차별을 경험했다. 여자 쇼핑호스트는 여자 아나운서와 같은 S등급이지만,남자의 경우는 아나운서가 S등급,쇼핑호스트는 그보다 낮은 A등급이었다. "여자 쇼핑 호스트들이 남자 속옷을 팔 때 샘플을 주고 '입어본 다음에 느낌을 말해달라'고 할 땐 당황스러워요. "
유통업체 매장 관리자인 김모 대리.회식이 있을 때마다 그는 '성희롱'을 당한다고 주장한다. 대부분 누님뻘인 여성 직원들은 흥이 달아 오르면 앞다퉈 그의 손을 끌고 무대로 나간다. '블루스'를 추면서 스킨십에 난감한 적도 자주 있다. 어깨동무는 물론이고 옆에 앉았다 하면 무릎에 손을 턱하니 올려놓는 누님들도 있다. 대처법은 여성들을 위한 성희롱 대처 매뉴얼과 같다. "반드시 손을 떼고 싫다는 티를 내 줘야 합니다. "
◆'남권을 보장해 달라'
외국계 화장품 업체 마케팅 부서에서 일하는 5명의 남자들은 최근 화장실이 없어진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같은 층에서 일하는 나머지 30명의 임 · 직원이 모두 여성이다보니 남녀 화장실을 모두 여성용으로 만들고,남성들은 한 층 위나 밑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라는 지시가 있었던 것이다. 이들 5명은 화장실을 사수하기 위해 임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로비활동을 벌여야 했다.
이뿐만 아니다. 체육대회에 가면 짐나르기는 기본이고 거의 모든 게임에 참여해야 한다.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1인당 8~10개 게임은 뛰어야 한다. 5명 모두 체육대회 후 며칠간 휴우증에 시달린다.
◆만인을 사랑해야 하는 운명
보험회사 영업소장 김모씨는 보험 설계사들을 대할 때 몇가지 철칙이 있다. 우선 전원이 모인 조회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선 배분이다. 특히 상대적으로 젊고 예쁜 설계사에게 시선이 더 갔다가는 난리가 난다고 한다. 그는 설계사들과의 단체 회식 때는 가장 고참인 설계사들을 앞에 앉힌다. "이렇게 할 때 말이 없어요. 혹시 회식 후 노래방이라도 같이 갈 때면 시선과 시간 배분에 더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
유통업체에서 20여명의 여성 판매사원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은 남 대리는 '칭찬의 위대함'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회의시간에 20대 중반의 막내 판매 사원에게 "예쁜 액세서리를 하고 오셨네요"라는 의례적인 칭찬을 했는 데 역효과가 나타났다. 조직의 주축인 40대 초반의 판매사원들 사이에서 "남 대리가 어린 막내만 편애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남 대리는 다음 회의 때부터 전략적으로 고참 판매원들의 장점을 관찰하고 칭찬하기 시작했다. 전략은 적중했다. 남 대리와의 커뮤니케이션도 한결 부드러워지고 일에 대한 열정도 달라진 것을 느꼈다. 남 대리는 "20대나 60대나 '마음은 소녀'라고 생각하고 대하는 것이 원만한 직장생활의 비결"이라고 말했다.
◆'여자들의 생각'을 읽는 능력자가 되다
청일점 남성들의 어려움은 대개 업무 초기에 일어난다. 어느 정도 경험을 쌓게 되고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해지면 오히려 적지않은 장점을 발견하게 된다. 무엇보다 여성들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여성부에서 일하는 K 사무관은 친구들 사이에서 연애 컨설턴트로 통한다. 여성들 틈바구니에서 일하다보니 여성 입장에서 남자를 바라보고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안목이 자연스레 키워졌다고 한다.
홈쇼핑 업체에서 일하는 이모 대리는 최근 옷입는 센스가 한결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성들을 대할 때의 매너도 세련됐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 대리는 "술자리가 적어지면서 저녁 시간을 자기계발과 여가선용 등에 활용하게 되는 것도 '여초 직장'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고경봉/노경목/강유현/강경민 기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