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태희 대통령 비서실장이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앞으로 공정 사회 아젠다를 보다 집중적으로 챙기겠다고 밝혔다. 또 국민과 함께 하는 동반 화합의 행보를 보이겠다고 말했다. 임 실장이 직접 거론한 분야는 세 가지다. 경제적 갑을 관계의 불공정,납세 병역 교육 근로에서의 불공정,경쟁 탈락자에게 사다리를 주는 것 등이다. 청와대 주변의 이야기로는 '동반 화합의 정치'라는 새로운 구호가 오는 8 · 15 경축사에서 제기될 예정이고 하반기에는 이와 관련된 병역비리 조사, 탈세 조사 등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임기 5년의 마무리 시기를 맞은 정권이 무언가 새로운 구호를 내걸고 심기일전을 다짐하는 것을 나무랄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지난해 8 · 15에서 제기된 공정사회 구호가 불러온 이념적 혼선을 생각하면 또 어떤 구호가 우리사회를 또 한 차례 좌클릭으로 몰아갈 것인지 걱정부터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 않아도 집권당의 좌경화가 허다한 포퓰리즘적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 국면이다. 병역 납세 교육 근로 등 국민 4대 의무의 불공정을 바로잡는 것은 정부의 일상적이고도 제도적 의무인 것이지 특정 기념일을 정해 기획작품을 내놓듯 하거나 큰 그림을 만들면서 수행해야 할 전략적 과업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문제는 불공정을 바로잡는 일이 법치주의의 틀이 아니라 정치적 기획을 통해 수행될 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런 구호들이 법과 제도 위에 서게 되면 국정 전반이 자의적이며 파행적으로 운영될 것이라고 충분히 전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근로에서의 불공정이라는 주제를 내세울 때 우리는 쉽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대우 해소를 떠올리게 된다. 문제는 방법이다. 지금 정부의 국정 대처방식을 보건대, 정규직의 특권을 해체하고 생산성에 입각한 공정한 급여체계를 만드는 자유주의적 법치의 수순이 아니라 기업을 비틀어 비정규직 임금을 일방적으로 올려주도록 압력을 넣는 폭력적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 것이 예상된다.

갑을 문제도 마찬가지다. 시장에서 을(乙)들 간의 치열한 경쟁을 무시하고 관계를 대기업과 중소기업 문제로 일원화하면 이는 곧바로 기득권을 옹호하는 소위 조합주의적 경제 관계로 필시 환원되고 만다. 우리는 바로 이런 이념의 혼란과 자의적 정치질서에 반대하는 것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헌법 119조 2항도 그렇다. 결국 시장원리와 법치로 해결돼야 할 문제를 국가 간섭으로 달성하려 들게 되고 그 결과는 경제의 파국이거나 자의적 권력 행사다. 좋은 구호를 세운다고 현실이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정의사회나 국민화합이라는 말은 5공화국을 비롯한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들이다. 상상력의 빈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