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배 아모레퍼시픽 사장(사진)은 재계의 대표적 '인수 · 합병(M&A) 신중론자'로 꼽힌다. 1991년 옛 태평양그룹 기획조정실장 취임과 함께 회사 경영을 맡은 지난 20년 동안 패션 증권 보험 등 10여개 계열사를 팔기만 했을 뿐 단 한 곳도 인수하지 않았다. "M&A로 기업가치가 증대되는 경우는 3건 중 1건에 불과하다. 나머지 2건은 실패 케이스로 분류된다. 로또 당첨을 꿈꾸는가. 그렇지 않다면 신중할 수밖에 없다"란 이유에서였다.

◆유럽 공략에 나선 아모레퍼시픽

재계에 아무리 'M&A 바람'이 불어도 꿈쩍 않던 서 사장을 프랑스산(産) 향수가 흔들어놓았다. 30년 역사의 명품 향수 브랜드 '아닉 구탈'이 주인공이다. 아모레퍼시픽은 아닉 구탈을 인수해 유럽시장 공략을 본격화하는 동시에 '프랑스에서도 인정받는 명품 브랜드의 주인'이란 이미지를 통해 중국 동남아시아 등 주력 시장에서의 점유율도 끌어올린다는 구상이다.

아모레퍼시픽이 아닉 구탈을 인수한 가장 큰 이유는 '뷰티의 본고장'인 유럽에 확실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시설투자비와 마케팅 비용이 적게 드는 향수로 유럽시장에서 기반을 닦은 뒤 중 · 장기적으로 '본업'인 화장품 시장에도 뛰어들겠다는 전략이다.

아닉 구탈 브랜드에는 향수는 물론 보디케어 및 스킨케어 라인도 있는 만큼 아모레퍼시픽이 유럽 화장품 시장을 탐색하는 데도 도움이 될 전망이다. 아닉 구탈의 명품 마케팅 노하우와 브랜드 전략을 배울 수 있다는 것도 인수 효과로 꼽힌다.

아모레퍼시픽이 향수로 유럽시장에 도전장을 내민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7년 자체 개발한 향수 브랜드 '롤리타렘피카'를 프랑스에 선보인 이래 지금도 유럽 전역에서 판매하고 있다. 론칭 초 · 중반에는 프랑스 내 향수 판매랭킹 4위에 오를 정도로 선전했지만,제품 포트폴리오가 단순한 탓에 가팔랐던 성장세는 한풀 꺾였다.

업계 관계자는 "아닉 구탈 인수로 대중적인 브랜드만 갖고 있던 아모레퍼시픽의 향수 라인이 한층 다양해지게 됐다"며 "아닉 구탈 제품 생산을 프랑스 샤르트르에 있는 롤리타렘피카 공장으로 넘기면 현재 50%에 불과한 공장 가동률을 상당부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2015년 '글로벌 톱10' 도약 목표

아닉 구탈 인수로 중국 동남아시아 등 주력 시장에서 아모레퍼시픽의 위상도 한층 높아질 것으로 회사 측은 기대하고 있다.

선진국에서 인정받는 브랜드를 갖게 되면 개발도상국을 공략하기가 훨씬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이 회사의 중장기 목표는 현재 20위권인 세계 화장품업계 랭킹을 2015년까지 10위권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아모레퍼시픽은 지난해 3조원 안팎이었던 매출(계열사 포함)을 2015년까지 5조원으로 늘리기 위한 핵심시장으로 중국을 꼽고 있다.

중국 내 '화장하는 여성' 수가 지금은 1억명 수준이지만,수년 내 3억~4억명으로 늘어날 것이란 점에 기대를 걸고 있다. 또 중국을 시작으로 동남아시아를 공략한 뒤 인도 파키스탄 등 서남아시아로 진출한다는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 일본 프랑스 등 선진시장 공략도 병행할 방침이다.

아모레퍼시픽 관계자는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 등 앞으로 집중적으로 파고들 25개 해외 전략도시를 최근 선정했다"며 "이들 시장을 집중 공략해 현재 14% 수준인 해외 매출비중을 2015년까지 29%로 끌어올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