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은행 인사지원부 박현우 과장은 작년 10월 2주간의 꿈같은 휴가를 즐겼다. 가족과 함께 서해안 해안선을 따라 천천히 남쪽까지 내려간 다음 여객선에 차를 싣고 제주도로 건너가 숨겨진 명소를 이곳저곳 돌아봤다. 길어야 1주일이던 기존 여름휴가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환상적인 코스였다. 박 과장은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갈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라며 “아이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이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최근 직원들의 장기 휴가를 권장하는 기업들이 많아지고 있다. 단순한 권유 차원에서 한발 더 나아가 2주 이상 장기 휴가를 아예 의무 사항으로 못 박는 곳도 있다. 신한은행은 작년부터 연차휴가를 묶어 의무적으로 2주짜리 장기 휴가를 가도록 하는 ‘웰프로’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정유 회사인 에쓰오일 직원들도 장기 휴가를 즐기고 있다. 연초에 전 직원에게 2주 휴가 계획서를 내도록 하고, 임원들부터 솔선해 2주 휴가를 떠난다. 광고 업계 선두 기업인 제일기획도 최대 2개월까지 휴가를 쓸 수는 ‘아이디어 휴가제’를 운영하고 있다.

기업들이 장기 휴가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다양하다. 우선 연차휴가를 사용하지 않은 직원들에게 지급해야 하는 연가 보상비 부담을 덜어낼 수 있다. 근로기준법에 따라 1년 이상 근무한 근로자에게는 최소 15일 이상의 연차 유급휴가가 발생한다. 유급휴가이기 때문에 휴가를 쓰지 않으면 남은 일수만큼 돈으로 보상해 줘야 한다. 하지만 2004년 신설된 규정에 따라 직원들이 연차휴가를 쓰도록 적극적으로 권고했는데도 이를 쓰지 않았다면 기업은 보상 의무를 지지 않아도 된다. 경기 침체로 기업들이 허리띠 졸라 매기에 나서면서 휴가 문제가 비용 절감의 주요 항목으로 부상한 것이다. 직장인들의 휴가 소진율이 60%대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장기 휴가는 연가 보상비 부담을 한꺼번에 털어버릴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인 셈이다.

물론 비용 절감만이 기업들이 장기 휴가 도입에 팔을 걷고 나선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과거 산업화 시대에는 ‘근로시간=생산성’이란 인식이 강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이런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얼마나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느냐보다 얼마나 집중해 효율적으로 일하느냐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충분한 휴식을 통한 재충전은 업무 집중도와 근무 만족도를 끌어올린다. 또한 장기 휴가는 담당 업무의 체계화와 비리 예방에도 효과적이다. 장기간 자리를 비우기 때문에 업무 인수인계가 필요하고 이 과정에서 숨겨진 비리가 적발되기도 한다.

지난해 2주 의무 휴가제를 도입한 신한은행은 비용 절감을 통한 일자리 창출에 초점을 맞춘 경우다. 이 은행은 지난해 의무 휴가제를 통해 연가 보상비 100억여 원을 절감했으며 이를 신입 사원과 계약직 주부 사원 채용에 모두 쏟아 부었다. 신한은행은 각 직원의 업무를 다른 직원이 대신할 수 있도록 백업 시스템도 구축했다. 과거 3~4일간의 짧은 여름휴가가 전부일 때는 처리해야 할 업무를 쌓아두고 휴가가 끝나면 돌아와 한꺼번에 몰아서 처리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또한 일선 영업점에는 직원 휴가로 업무가 몰릴 때에 대비해 전직 은행원 출신 주부들로 ‘피크타임 텔러’를 따로 고용했다.

장기 휴가에 대한 직원들의 반응도 긍정적이었다. 처음에는 연가 보상비를 받을 수 없다는데 대한 불만이 나오기도 했지만, 연말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만족한다는 의견이 90%가 넘게 나왔다. 올해 2년 차가 되면서 2주 휴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직원들이 많아지고 있다.

지난해부터 2주 휴가제를 시행하고 있는 에쓰오일도 백업 시스템 구축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 회사는 임원이나 팀장이 휴가를 떠나면 다른 부서 임원이나 팀장이 와서 업무를 대신한다. 이를테면 홍보팀장이 휴가를 떠났을 때 총무팀장이 홍보팀장을 대행하는 식이다. 2주간 대행 경험을 통해 총무팀장은 홍보팀 업무를 대충이나마 알게 되고 홍보팀 직원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에쓰오일에서 새 휴가제가 안착하는 데는 최고경영자(CEO)의 강한 의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에쓰오일 홍보팀 관계자는 “경영진이 월별·분기별로 휴가 실적을 직접 챙기면서 눈치 보지 않고 휴가를 갈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은 쇳덩이를 다뤄야 하는 업종 특성상 폭염이 쏟아지는 여름철 2주간 전 사업장이 휴가에 들어가는 집중 휴가제를 시행하고 있다. 휴가 시기는 9월 마지막 주와 8월 첫 주로 매년 고정돼 있다. 같은 조선 업체인 대우조선해양은 8월 첫 주와 둘째 주를 쉰다. 굴삭기를 생산하는 두산인프라코어도 집중 휴가제를 운영하지만 형태는 약간 다르다. 공장이 휴무에 들어가는 8월 첫 주를 중심으로 앞뒤 한 주를 골라 2주간 쉴 수 있게 한다. 각 팀 내에서 업무에 지장이 없도록 7월 마지막 주를 추가로 쉬는 사람과 8월 둘째 주를 쉬는 사람을 적절히 나눈다.

GS건설은 7~8월 두 달 동안 각 팀별로 2주 휴가를 간다. 하계휴가 3일에 각 개인별 연차를 붙여 쓰는 방식이다. 7~8월은 건설 업체에는 분양 물량이 별로 없는 비수기에 해당한다. 직원들은 2주 휴가를 이용해 유럽 여행을 떠나거나 템플스테이에 참가하기도 한다.

◆ CEO부터 팔 걷고 휴가 독려

제일기획은 2007년부터 아이디어 휴가제를 운영하고 있다. 제일기획 홍보팀 장숙현 프로는 “광고 회사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생명이고 업무 스트레스도 매우 강하다”며 “재충전 기회를 마련해 주자는 차원에서 도입한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디어 휴가제의 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각 개인이 갖고 있는 연차휴가를 붙여서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한 것이 전부다. 핵심은 눈치 보지 않고 누구나 연차를 붙여 쓸 수 있는 분위기를 회사에서 만들어 줬다는 것이다. 아이디어 휴가제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지만 사전 계획서를 내거나 결과 보고서를 따로 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온라인 게임 업체 넥슨은 3년 차, 6년 차, 9년 차 직원에게 연차휴가 외에 각각 10일, 10일, 20일의 특별 휴가를 부여한다. 입사 3년 차 이상이면 누구나 조건에 해당되기 때문에 혜택을 보는 직원이 상당히 많다. 차유선 넥슨 홍보팀 과장은 “주말과 휴일을 끼면 2주간 쉴 수 있다”며 “장기 휴가이기 때문에 그동안 해보지 못했던 일에도 도전해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고 말했다.

오픈마켓 업체인 옥션도 입사 후 5년마다 한 달 간의 유급휴가를 갈 수 있다. 홍윤희 옥션 홍보팀 부장은 “안식 휴가는 성장 속도와 변화가 빠른 오픈마켓에서 직원들의 근무 의욕과 애사심을 높여주는 중요한 장치 역할을 한다”며 “안식 휴가 후 업무 능률이 높아져 회사에도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SK텔레콤은 10년 차(45일)와 15년 차(10일), 20년 차(45일)에게 장기 휴가를 제공하는 리프레시 제도를 2002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KT도 10년 차와 20년 차 장기 근속 직원에서 6개월~1년의 재충전 기회를 주고 있다.

현재 국회에는 근로시간저축휴가제를 도입하는 내용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정부 발의로 제출돼 있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기업들의 장기 휴가 도입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사용하지 않은 연차휴가나 초과 근로(연장·야간·휴일 근로)를 근로시간으로 환산해 저축한 뒤에 근로자가 필요할 때 휴가로 사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장승규 기자 sjkang@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국경제매거진 한경BUSINESS 816호 제공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