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2차 구제금융안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장클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사진)의 일관되지 않은 행보가 도마에 올랐다. 그리스의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유발하는 어떤 조치에도 반대해 온 그가 민간 채권단의 자발적 참여를 묵인했기 때문이다.

민간 채권단이 손실을 입으면서 지원에 참여할 경우 그리스에 대해 선별적 디폴트를 선언하겠다고 신용평가사들이 경고한 것을 감안하면 의외의 결정이다. 유럽 금융가는 2차 지원 과정에서 ECB의 담보가치가 훼손되지 않도록 독일과 프랑스 정부가 트리셰 총재에게 약속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스에 대해서만 예외 규정을 적용한 것이어서 논란이 일 전망이다.

로이터통신은 21일(현지시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유로존 정상회담 전날인 20일 베를린에서 마라톤 협상을 벌인 후 트리셰 총재가 회담장에 들어갔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프랑스와 독일이 민간 채권단 참여에 대해 의견을 조율한 뒤,걸림돌로 작용했던 ECB 채권 담보 문제를 놓고 트리셰 총재를 압박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ECB는 회원국에 자금을 지원하면서 해당국의 채권을 담보로 받는다. 트리셰 총재는 그리스가 디폴트 처분될 경우 채권의 담보가치가 크게 떨어져 손실이 불가피한 만큼 디폴트 가능성이 높은 지원안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로이터는 트리셰 총재가 2주 전에도 그리스에 대한 디폴트나 어떤 신용불량 조치도 ECB가 절대 수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하지만 트리셰 총재는 두 정상을 만난 후 민간 채권단 참여를 허용하는 쪽으로 급선회했다.

로이터는 사르코지 대통령과 메르켈 총리가 ECB의 담보 채권이 사실상 보장되는 대안을 트리셰 총재에게 제시한 것으로 분석했다. 유로권의 우량 국가들이 그리스 채권에 대해 공동 보증하고 유로존재정안정기금이 지급을 보증하는 '당근'을 내밀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EFSF가 금융위기 지원만이 아니라 국제통화기금처럼 평상시에도 회원국에 자금을 지원하거나 은행의 자본 확충 등이 가능하도록 기능을 확대해 유로존 금융 안정을 더욱 확고히 하겠다는 아이디어도 트리셰 총재의 마음을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EFSF가 이미 채무 위기에 빠진 회원국들만 지원하는 것은 '형평상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나오자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의 위기를 예방하는 역할도 해야 한다는 것이 트리셰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로이터는 ECB가 '일시적 조치'라는 단서를 달아 그리스 채권이 디폴트되더라도 예외적으로 담보로 인정하기로 한 것은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ECB가 원칙을 깨고 정치적 논리로 움직인 것은 중앙은행의 생명인 독립성을 해칠 수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박해영 기자 bon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