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그리스 아테네 국회의사당에서 여당인 사회당의 코스타스 카르탈리스 의원과 인터뷰 약속이 있었다. 그리스 재정위기에 대한 현지 정치인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만나기로 한 오전 10시15분보다 10분 정도 일찍 도착해 국회 출입 관리 담당자에게 인터뷰가 잡혀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담당자는 "명단에 이름이 없다"며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이럴 경우 출입 관리 담당자가 해당 의원실에 전화를 해 인터뷰 약속이 돼 있는지 확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공무원은 "나는 의원실에 전화할 권한이 없다"며 느긋하게 담배를 입에 물고 동료들과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결국 인터뷰를 주선해 준 주(駐)그리스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었고,의원실에서 다시 출입 관리실에 연락을 해준 뒤에야 들어갈 수 있었다. 약속 시간을 40분 정도 지난 10시55분에야 카르탈리스 의원을 만났다.

이 에피소드를 교포 기업인에게 들려줬다. 그는 "40분 정도 지체됐으면 양호한 편"이라고 했다. 이 기업인은 "그리스 공무원의 비효율성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라며 "공무원 때문에 외국인들이 투자를 꺼린다는 말까지 있다"고 전했다. 사업 허가에 필요한 서류를 갖고 가면 추가 자료를 요구하며 시간을 끄는 탓에 결국 뇌물을 주고 나서야 허가를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그리스의 비대한 공무원 조직은 이번 재정위기가 오는 데 한몫을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게오르게 파판드레우 총리까지 나서 공무원 사회의 비효율성을 고치기 위해 일하지 않는 공무원들을 감원하겠다고 했지만,이들에게서 달라진 점을 느낄 수 없다는 게 교민들의 평가다.

공무원뿐만이 아니다. 그리스 시민들 중에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가진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정부와 은행을 믿지 못하는 일부 국민들은 예금을 인출해 금 사재기에 나섰고,독일 등 다른 나라로 재산을 빼돌리고 있다"(파이낸셜타임스)는 보도마저 흘러나온다.

문득 우리나라에서 외환위기 직후 제일은행원들이 찍은 '눈물의 비디오'가 생각났다. 자신들은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떠나지만 남은 직원들은 꼭 은행을 살려달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스인들이 이 비디오를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이태훈 아테네/국제부 기자 bej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