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부가 연내에 도입 추진 중인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을 놓고 정부와 산업계 간 갈등이 본격화되고 있다. 화학물질 위해성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환경부와 기업경쟁력 저하를 우려하는 산업계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화평법이 통과되면 최소 1만여곳의 국내 기업들이 적용 대상이 된다. 화평법이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처럼 정부와 산업계 간 첨예한 갈등을 불러올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화학물질 규제 강화하겠다는 정부

환경부는 지난 2월 말 화평법을 입법예고했다. 오는 9월 초 관련 법안을 국회에 제출한 뒤 12월 말까지 승인을 받겠다는 계획이다. 법안이 연내 통과되면 1년 유예를 둔 뒤 2013년부터 본격 시행된다. 화평법은 국내에 유통되는 연간 0.5t 이상 모든 화학물질을 정부에 보고 · 등록하도록 하는 법이다. 위해성이 있다고 판정되면 기업은 화학물질의 사용을 제한하고,대체물질 사용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1991년 제정된 '유해화학물질 관리법'에 의해 국내에서 유통되는 6000여종의 신규 화학물질에 대해서만 등록이 의무화됐다. 현재 국내에서 유통되는 화학물질은 4만3000종으로,이 중 1991년 이전에 유통된 기존화학물질은 3만7000종에 달한다. 이 물질에 대해선 등록이 의무화되지 않아 위해성 판단이 불가능했다.

이에 따라 화평법 도입을 통해 신규 및 기존화학물질에 대한 위해성을 평가하겠다는 게 환경부의 설명이다. 또 기존 유해화학물질관리법상 18개였던 위해성 평가항목을 45개까지 늘려 화학물질에 대한 규제를 더욱 강화할 예정이다.

이지윤 환경부 화학물질과장은 "유럽연합(EU),일본,미국 등 주요 선진국을 중심으로 환경에 대한 규제가 점차 강화되고 있다"며 "국민 건강을 보호하고 국제 화학물질 규제 기준을 맞추기 위해선 화평법 도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산업계,"도입에 신중 기해야"

김영천 한국석유화학협회 본부장은 "화학물질 관리를 위한 법 도입에는 찬성한다"며 "그러나 도입하는 과정에 좀 더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무작정 2013년부터 법안을 도입할 게 아니라 시범사업을 추진한 후 문제점 발굴 · 해결 과정을 거쳐 도입해도 늦지 않다"고 지적했다.

산업연구원은 화평법이 도입되면 2022년까지 직접비용만 최대 2조6000억원이 소요되고 2만여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보고서를 최근 내놓았다. 한기주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기업의 화학물질 공급 중단에 따른 손실 및 대체물질 개발 등의 간접비용까지 포함하면 전체 비용은 직접비용의 수배에 이를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화학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EU의 REACH 법안을 본뜨는 데만 치중하면서 국내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REACH란 2007년 6월부터 EU 내에서 1t 이상 유통되는 모든 화학물질은 등록 및 허가 절차를 거친 후 사용하도록 하는 제도다. 화평법은 이 REACH를 벤치마킹한 법안으로,K-REACH라고도 불린다.

이 관계자는 "EU조차 REACH를 도입하는 데 산업계의 반발을 고려해 6~7년의 검토 과정을 거쳤다"며 "국내 기업들이 1년에 불과한 유예기간에 준비하기는 사실상 어렵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화학물질 등록 의무 기준을 EU보다 엄격한 0.5t으로 규정하면 국내 기업이 해외 기업에 비해 역차별을 받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대해 환경부 관계자는 "올 들어서만 화평법과 관련한 다섯 번의 공청회를 통해 산업계의 의견을 수렴했다"고 반박했다.

법 시행을 앞두고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았다는 점도 논란거리다. 화학물질의 위해성을 평가하기 위해선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GLP(우수실험실 운영기준) 기관이 필요하다. 지난해 기준으로 국내 GLP 기관은 25곳에 불과하다. 화학업계 관계자는 "화학물질 위해성을 평가할 국내 GLP도 부족한데 화평법이 2013년부터 시행되면 우리 기업들은 (평가를 위해) EU나 일본 GLP로 몰려나갈 것"이라고 지적했다.

강경민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