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에겐 묘한 능력이 있는 것일까. 굵은 빗방울을 뚫고 걸어왔다는데도 빗방울이 스친 기색을 찾기 어렵다. 메고 온 묵직한 검은색 카메라 가방에도,작품 견본이 들어 있는 커다란 종이 재질의 원통에도 물기 하나 없다. 인근 지하철역에서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까지 작품과 카메라가 젖을까 애면글면 걸어왔을지 모르겠다 싶어 미안한 생각이 들 때쯤 임선영 씨(사진작가 · 39)가 환하게 웃었다.

지난 27일 리움미술관에서 '시테' 출신의 임씨를 만났다. 시테(Cite Internationale des Arts)는 파리국제예술공동체를 지칭하는 줄임말로 신인 작가들 사이에선 '꿈의 예술인 지원 프로그램'으로 꼽힌다. 시테는 프랑스 정부가 1965년 외국인 작가 육성을 위해 시테섬에 있는 허름한 호텔을 사들이면서 시작됐다. 240여개의 아틀리에와 30여개 스튜디오가 생겨나면서 전 세계에서 소설가와 작곡가 화가 사진작가들이 몰려들었다. 예술인들의 응집력은 시테 주변을 문화거리로 바꿔놓았다. 크고 작은 화랑들이 들어서면서 시테는 창작활동을 위한 세계 최고의 창작공간으로 변신했다.

임씨가 시테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작가들을 위한 삼성문화재단의 시테 지원 프로그램 덕이다. 한때 천경자와 같은 화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미국 새너제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파슨스 디자인스쿨에 들어갔다. 우연히 듣게 된 사진학 수업이 그의 마음을 돌리면서 카메라를 잡게 됐다.

사진에 빠진 뒤로는 영국 첼시대에서 순수미술을 공부했다. 그의 귀에 삼성의 '시테' 지원 프로그램 소식이 들린 것은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크고 작은 전시회를 하던 즈음이었다. 1996년부터 매년 한 명씩 신인을 선발해 50㎡(15평) 규모의 시테 아틀리에에서 1년간 작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었다. 예술인 비자에 왕복 항공권 제공에다 작업실 사용료 0원.게다가 영국 독일 등 28개 나라에서 온 각국의 작가들을 만나고 전시까지 할 수 있었다. 임씨는 그길로 작업 계획서를 썼고 2009년 4월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시테 '삼성방'에서 보낸 1년여의 시간은 오롯한 자기몰입의 시간이 됐다. 창밖을 내다보면 고딕풍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자태와 센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때때로 현지 갤러리 사람들이 작품을 보러 오거나 전시 제안을 하기도 했다.

작업에 지칠 땐 옆 작업실의 작곡가들이 펼치는 공연에 귀를 기울이며 내면의 예술적 토양을 쌓았다. 그는 "한국 문화계에서 '아웃사이더'나 마찬가지였던 신인작가가 시테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견문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고 했다. 시테에서 만난 작가들과의 인연을 계기로 독일 현지 전시회에도 초청을 받았다.

지난해 3월엔 서울 사간동 갤러리 아트사간에서 '귀향(Going Back Home)'전을 열며 작가로서의 역량을 뽐내기도 했다. 그는 "파슨스를 졸업하고 귀국해 한때 패션 브랜드업체인 지방시에서 근무하기도 했다"며 "삼성의 시테 지원이 없었다면 사진작가로서의 꿈을 실현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간 임씨를 포함해 삼성의 시테 후원을 거친 예술가는 조용신 윤애영 김영헌 금중기 박은국 김진란 한기창 등 12명이다.

박민선 리움미술관 홍보팀장은 "삼성문화재단은 미술 영재들이 한국이 아닌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을 확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경갑/김현예 기자 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