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시스템에어컨 히트의 아이러니
전기요금이 4.9% 인상됐다. 유가와 석탄가가 고공행진을 하는데도 전기요금은 계속 묶여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의 원가 회수율은 고작 86.1%였다. 이번의 요금 인상으로 회수율은 90%를 겨우 턱걸이한다. 물가 안정의 목표에만 집착한 정부는 결국 한전을 적자의 늪 속에 좀 더 방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한전의 적자 부담을 조금이라도 완화하려면 발전회사들이 손해를 분담해야 한다. 한전이 발전회사들로부터 전력을 사들이며 지급하는 도매가격을 그만큼 낮춰야 하는 것이다. 도매가격은 시장의 수요공급 사정을 반영해 결정돼야 하는데도 가격 결정의 시장규칙은 이미 발전회사의 이익을 줄여서 한전의 부담을 덜어주는 장치로 전락한 지 오래다.

한전의 자회사들이야 어쩔 수 없겠으나 민자발전사들은 무슨 죄인가. 부당한 시장규칙에도 불구하고 민자발전사들이 영업을 계속하는 까닭은 현재의 비정상적 상황이 조만간 개선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지 결코 현상을 만족스럽게 보기 때문이 아니다.

정부가 현재와 같은 요금정책을 고수하는 한 새로운 설비투자를 감행할 민자발전사는 없다. 물론 한전의 발전자회사들은 공기업인 만큼 수익성과 무관하게 설비투자에 나설 수도 있다. 그런데 발전자회사들이 한전의 적자 부담을 나누어 지다가 재무구조가 나빠지기라도 한다면 낭패다. 불량한 재무구조로는 발전소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민자발전사들은 신규 발전소 건설에 나서지 않을 것이고 한전의 발전자회사들은 자금을 조달하지 못해 발전소를 건설할 수 없는 최악의 사태에 내몰릴 수도 있다.

신규 발전소 건설은 이처럼 어려워지고 있는데 전력 소비는 오히려 폭증하는 추세다. 고급 에너지인 전력이 값마저 다른 에너지보다 더 싸다면 누군들 전기를 쓰려들지 않을까. 시스템 에어컨은 실외기 한 대에 건물 내 각 실의 특성에 맞게 다양한 실내기를 연결해 실내외 공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만든 장치이다.

이 시스템 에어컨은 지나치게 싼 전기요금이 전기 냉 · 난방을 유류 냉 · 난방보다 더 저렴하게 만든 결과 나타난 히트상품이다. 공공기관들이 앞장서서 시스템 에어컨을 설치한 까닭은 그렇게 함으로써 냉 · 난방비를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비정상적으로 낮은 전기요금이 계속되면 앞으로 더 많은 전력 다소비형 히트상품이 줄줄이 개발될 것이다.

국내 소비자들만 전력 소비를 늘리는 것이 아니다. 지난 3월 대지진과 해일로 발전설비를 잃은 일본 기업들도 전기를 찾아서 한반도로 넘어오고 있다. 클라우드 컴퓨팅이 본격화하면 전력 다소비적 인프라는 전기요금이 싼 곳을 찾게 마련인데 한국은 당연히 유력한 후보지다. 빨라도 2014년이 돼야 현재 건설 중인 발전설비가 전력공급에 투입된다. 그때까지는 높은 요금으로라도 수요증가를 억제해야 전력대란을 피할 수 있는데 이번 요금 인상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과소비를 부추긴다. 전기요금이 지금처럼 지나치게 싸면 절전으로 얻는 이익이 거의 없으므로 전력의 효율적 이용과 절전을 위해 노력할 유인이 생겨날 리 없다.

전력의 효율적 이용을 겨냥하는 스마트 그리드 산업은 유망한 미래 성장산업으로 각광받고 있다. 다행히 한국은 일찍부터 스마트 그리드에 관심을 기울였고 지금까지는 선두그룹에 속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낮은 전기요금으로는 스마트 그리드의 이익이 별로 크지 않은 만큼 좋은 비즈니스 모델이 나오기 어렵다.

지나치게 낮은 전기요금은 미래 성장산업 육성에도 걸림돌로 작용한다. 또 전력 소비는 장려하면서 전력 공급은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발전소 건설엔 짧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전력대란은 이제 시간 문제가 됐다. 얼마 되지 않는 물가안정 효과의 대가로는 너무 엄중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모처럼 국제 경쟁에서 기선을 잡은 스마트 그리드 산업의 주도권조차 내놓게 만들지도 모른다.

이승훈 < 서울대 경제학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