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여행] 등대 가득 메운 새빨간 맹세…그들은 지금도 사랑하고 있을까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 경기 시흥 (上)
소래산 마애보살입상에선 부지런히 바위 쪼아댔을 석공의 땀 냄새 나는 듯
시내 한눈에 보이는 역적산…이토록 풍경이 아름다운데 누가 이름을 그리 지었을꼬
소래산 마애보살입상에선 부지런히 바위 쪼아댔을 석공의 땀 냄새 나는 듯
시내 한눈에 보이는 역적산…이토록 풍경이 아름다운데 누가 이름을 그리 지었을꼬
조선시대 때 금천(안양) · 안산 · 과천까지 품었던 시흥은 지금 시흥군 소래읍 · 군자면 · 수암면을 합쳐 시가 된 도시다. 시흥 여정의 시작은 수도권 민물낚시꾼들의 샹그릴라 물왕저수지(흥부저수지).장마기에 처한 저수지는 황톳물빛을 안고 있다. 그래도 물의 청탁을 구분하지 않는 조사들은 의연하게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이곳의 주 어종은 잉어,붕어,메기,향어 등인데 간혹 참게도 잡히는 모양이다.
◆중국에서 연꽃씨를 들여온 '제2의 문익점'
옛 하지골(현 하상동) 산기슭,우리나라 최초의 농학자인 사숙재 강희맹(1424~1483)의 묘를 향해 오른다. 묘로 오르는 길 중간의 비각에는 신도비가 자리잡고 있다. 비문을 쓴 서거정은 '집에 있어서는 청백하여 관절(사사로운 부탁)이 행해지지 않았으며 천성이 효유하여 대민공(부친)과 인재(형 강희안)가 병이 들자 친히 약을 지어 조석으로 봉공하고 옷도 못 벗고 눈도 못 붙이는 일까지 있었다'고 강희맹의 사람됨을 전한다.
그의 생전 성격을 닮아 장명등 · 망주석도 없는 무덤은 그저 소박하기만 하다. 52세에 벼슬에서 물러난 강희맹은 금양현(시흥)에 은거하며 농사를 짓고 그 체험을 토대로 《금양잡록》이라는 뛰어난 농서를 남긴 실천적 선비였다. 강희맹이 중국 전당지에서 채취해온 연꽃씨를 시험재배했다는 관곡지로 발길을 옮긴다. 관곡지 들머리에 있는 드넓은 연꽃테마파크에서는 이제 막 피기 시작한 연꽃이 청초함을 뽐내고 있다. 암,세상이 흐려도 제 할 나름이고 말고.
관곡지는 가로 23m×세로 18.5m밖에 되지 않는 작은 연못이다. 그러나 한때는 각종 부역과 세까지 면제받으면서 관리해주는 연지기를 거느렸던 귀하신 몸이다. 끝에 옅은 붉은빛을 띤다는 관곡지 특유의 백련은 아직 피어나지 않았다. 섭섭한 마음을 누르며 마애보살입상(보물 제1324호)을 찾아 소래산(299m)으로 향한다.
◆소멸하는 것들의 쓸쓸한 아름다움'광활한 폐염전'
하대야동 삼림욕장 입구와 청룡약수터를 지나 소래산을 오른다. 물오리나무,느릅나무,물푸레나무 등이 끊임없이 팽창과 확장을 거듭하면서 그늘을 만들어가고 있다. 여행이란 저렇게 스스로 자기 마음에 쉬기 좋은 그늘을 만드는 일이리라.높이 14m,발 길이 1.24m에 이르는 거대한 고려시대 마애보살입상 앞에 이른다. 추락의 위험을 무릅쓴 채 높다란 나무 사다리를 타고 부지런히 바위를 쪼았을 석공을 생각한다. 대충 처리했더라도 상관없었을 발가락까지 저토록 섬세하게 새겨 넣은 것은 이 석공이 긴장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탁월한 장인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소래산 정상에 오르자 시흥시내와 저 멀리 인천 남동구까지 사방이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엇방죽과 뒷방죽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장곡동 갯골생태공원으로 향한다. 전망대와 배수갑문을 지나고 맹꽁이,금개구리 서식처를 지나 내만갯골 옆으로 우거진 갈대밭 사이를 걷는다. 우측으로 광활한 옛 소래 폐염전 증발지가 보인다. 소금 버캐가 하얗게 피어 있고 붉은 퉁퉁마디가 수북이 자라고 있다.
도판염을 생산하는 데 쓰였던 타일조각들이 산산이 흩어져 있고 소금물을 가두어 두던 창고인 해주창고가 지붕째 쓰러져 있다. 쓸쓸함을 내용으로 하는 폐허의 아름다움이 가슴 속을 한 점 바람처럼 스쳐간다. 그러나 애써 일궈온 자신의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은 얼마나 마음이 쓰라렸을까.
폐염전을 따라 정처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포동빗물펌프장에 이른다. 1936년 이래 60년간 포동과 방산동 주민들의 삶터였던 이곳은 1996년 천일염 수입 자유화에 따른 채산성 악화로 문을 닫은 소래염전이 있던 곳이다. 남동염전,군자염전과 더불어 우리나라 소금 총 생산량의 30%를 차지했던 염전이다.
현재 이곳에는 다양한 염생식물과 양서류,이를 먹이로 삼는 조류들이 찾아들고 있다. 서서히 생태계가 복원되고 있다는 신호다. 방치된 폐허가 자연생태를 복원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라는 것은 얼마나 기막힌 아이러니인가.
◆휘황찬란한 현대성을 들추면 빗살무늬 추억이 보인다
아카시아길과 논 가운데 섬처럼 떠 있는 섬산을 지나 월곶포구에 이른다. 횟집들이 진을 치고 있는 부두 앞에는 깊은 갯골과 갯벌이 펼쳐져 있다. 물 빠진 갯벌 속에 제멋대로 쑤셔박힌 배들.조심할지어다. 사람이거나 무생물인 배거나 지향점이 없을 땐 저렇게 아무렇게나 쑤셔박힐 수 있느니.
마음속에서 울리는 경고음을 들으며 포구를 등진 채 옥구도를 향해 떠난다. 옥구공원은 고향동산 · 숲속교실 · 산책로 등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자연공원이다. 그러나 1998년 초만 해도 해안 초소가 있어 민간인들의 출입이 통제되던 곳이다. 옥구공원 '역적산'을 오른다. 우리나라의 모든 산은 한양을 향해 솟았는데 이 산만 중국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란다.
10여분가량 산을 오르자 정상(95m)인 옥구정에 닿는다. 서쪽으로 송도 신도시와 방금 지나온 월곶포구,시화방조제,대부도 등도 보이고 동으로 녹지대에 둘러싸인 시흥시내가 보인다. 누가 이토록 멋진 풍경을 선사하는 산을 일러 역적산이라 폄훼했단 말인가. 오장육부가 놀부 찜쪄 먹을 정도로 비비꼬인 놈이로고.
덕섬(똥섬)을 지나 1922년 일제가 염전을 만들기 위해 제방을 쌓는 바람에 얼떨결에 육지가 된 오이도에 이른다. 오이도 유적(사적 제441호)을 찾아 옥터초등학교 뒷산을 오른다. 오이도는 '가운데살막 패총' 등 다수의 패총과 수혈주거지,야외 노지(화덕 자리) 등 신석기시대 생활문화를 엿볼 수 있는 보고다.
오이도 해양단지를 지나 선착장으로 가는 길엔 횟집거리와 조개 칼국수집들이 즐비하다. 안말,살막,뒷살막 등 예전 살갑던 이름을 지닌 마을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한 시인이 '싸락싸락 걸어서 유배 가고 싶은 곳'(임영조 시 '오이도')이라고 했던 오이도는 너무 낯익은 삶을 피해 유배온 나그네에겐 쉽게 적응하기 힘든 낯섦으로 다가온다.
오이도의 명물인 빨간등대 전망대에 오른다. 등대로 오르는 계단 벽은 빼곡히 채운 사랑의 맹세들로 가득하다. 사랑이 삶의 등대가 되지 못하는 시대에 사랑 타령들은 왜 이리도 흔한지.대부도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시화방조제와 송도신도시의 우뚝 선 마천루들이 망막 위에 떠오른다. 선착장에는 파도 소리를 안주 삼아 병어회를 드는 사람들,저녁노을을 마음 깊숙한 곳에 담아가려는 사람들이 벌써부터 진을 치고 앉아 있다. 그러나 지는 해보다 마음이 먼저 저무는 나그네는 지는 해를 보지 못한 채 항구를 떠난다.
숲길 거닐까…바닷길 좇을까…코스따라 '好好'
◆ 여행정보
'뻗어 나가는 땅','넓은 땅'이라는 뜻을 지닌 늠내길은 오감으로 자연을 느끼며 걸을 수 있는 한가롭고 여유있는 도보여행 길이다. 1코스 숲길(13㎞)→시청→ 옥녀봉→ 군자봉→진덕사→ 잣나무숲→선사유적공원→ 시청(4~5시간 소요) 제2코스 갯골길(16㎞)→시청→갯골생태공원→ 섬산→ 방산대교→빗물펌프장→갈대밭→시청(4~5시간 소요) 제3코스 옛길→꼬꼬상회→하우고개→소산서원→ 소래산마애상→꼬꼬상회(4시간 소요) 제4코스 바람길→옥구공원→덕섬→ 빨간등대→ 오이도기념공원→ 중앙완충녹지대→ 걷고싶은거리→ 정왕호수공원→ 옥구공원
제2 코스인 갯골생태공원에서는 8월12~14일 경기도 대표축제인 시흥갯골축제가 열린다. 이번 갯골축제에서는 제1회 전국어쿠스틱음악제도 열려 축제의 흥을 돋운다.
시흥시 신천동 창조자연사박물관은 20여종의 움직이는 공룡과 골격공룡,초대형 해백합 화석을 비롯해 화석 180여점,광물 190여점,어류 180여점,패류 6100여점 등 많은 화석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자연사박물관이다. 과학교육 프로그램과 화석 발굴,공룡 만들기 등 현장 체험학습도 운영하고 있다. 관람료 7000원,어린이ㆍ학생 6000원(박물관 본관+생태관+스크래치).문의 홈페이지(cjmuseum.net/),(031)435-1009
◆ 맛집
대야동의 한식집 흙과사람들(031-318-3822)은 전통 한식을 맛깔스럽고 깔끔하게 차려낸다. 산채정식 1만5000원,간장꽃게장정식 2만원.장현동에 있는 황태마을(031-404-5985)은 황태요리를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집이다. 황태정식 7000원,백반(2인 이상) 5000원.
안병기 여행작가 smreoquf@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