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방학 동안 유네스코에서 몇 달 일했던 경험이 있다. 초등학생에게 세계문화유산을 가르치는 일이었는데,아이들에게 가르칠 내용을 미리 인터넷으로 찾아보며 준비했다. 수업 날 한 아이가 질문을 했는데 그 친구는 질문에 대한 예상 답변을 인터넷으로 미리 찾은 후 그 답에 대한 더 심도 있는 질문을 해 나를 당황하게 했다. 백과사전을 찾아 공부하던 필자의 초등학교 시절과 많은 차이를 느꼈다.

하루는 서재를 정리하다 추억의 물건이 든 상자 안에서 카드를 봤다. 크리스마스 때 친구들에게 받은 직접 손으로 그린 카드를 비롯해 중학교 때 삼총사 친구들과 우정을 맹세한 서약편지 등 학창 시절의 냄새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문득 손으로 적은 글을 주고받은 지 오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지털 시대가 온 뒤 손으로 종이에 적지 않고 타이핑을 하는 편리함이 생겼다. 인터넷상으로 주고받는 메일이나 카드 속에서 모든 사람의 필체는 깔끔하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사람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다. 손으로 직접 편지를 써보면 타이핑할 때와는 감정도 달라지고 편지를 받은 사람은 그 글씨를 보면서 보낸 이를 다시 느낄 수 있다. 여행지에서 날아온 엽서에서는 그곳의 향기를 느낄 수도 있다. 디지털은 편리함과 신속함을 줬지만 아날로그만이 갖고 있는 추억을 줄 수는 없는 듯하다. 다시 아날로그로 돌아가자니 그 불편함을 느끼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도 든다.

오늘도 필자는 이동하는 차 안에서 태블릿PC로 결재서류를 받아보고 화상회의로 미국 지사 업무를 체크한다. 현장 기기에 관한 보고서는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서 보내면 그 사진을 보고 결재한다. 결재 건수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간단한 보고 때문에 왔다갔다하는 직원들의 노고를 덜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스마트폰,태블릿PC,전자책,MP3,CD플레이어,PC,TV 등 우리는 디지털에 둘러싸여 있다. 이를 환영하고 디지털의 발전을 동경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아날로그를 그리워하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편하고자 만든 디지털에 어느 순간 인간이 끌려가는 것 같기도 하다. 편리하지만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 줄어들어 회사가 일만 하는 곳으로 변질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든다. 여행을 가도 디지털이 너무 발전하다 보니 업무를 연장하게 된다. 어디서나 와이파이가 되고 스마트폰으로 바로 체크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필자는 넷북으로 책을 읽고,집안에서 게임기를 이용한 운동도 가끔 한다.

편리함이라는 이유로 디지털은 필요하다. 그렇더라도 감정이라는 것을 가진 인간에게는 아날로그 역시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그래서 나는 머리는 디지털이지만 마음은 아날로그인 '디지로그형' 인간이 되려고 노력한다. 불현듯 초등학생 때 레코드 가게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테이프를 사 카세트로 들으며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던 추억이 떠오른다.

윤지현 < 세진중공업상무 apriljihyun@sejinheav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