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암 선고받은 한국 제약산업
1968년 개장한 안양베네스트골프장은 국내 명문 골프장의 대명사다. 이 골프장의 회원이 되는 건 부와 명예의 상징이다. A제약사 B대표는 "안양 창립회원 가운데 제약사 오너들이 많았다"며 "당시 제약산업의 위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골프장엔 아직도 제약사 오너 회원이 많다는 B대표의 해석이 눈길을 끈다. "전기 · 전자,기계,화학 등 다른 업종 오너들은 사세를 확장하면서 아예 골프장을 짓거나 신흥 명문 골프장 회원권으로 갈아탔는데,성장 정체에 빠진 국내 제약사는 옛 추억에 잠겨있을 따름이죠."

국내 제약산업이 흔들리고 있다. 자칫 필리핀,대만처럼 다국적 제약사에 안방을 모두 내 줄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엄살만은 아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통하는 신약을 갖고 있는 토종제약사는 단 한군데도 없다. 연간 13조원 규모의 내수시장에서도 토종 제약사는 3조5000억원대 매출을 올리고 있을 뿐이다. 100년 한국 제약사에 아직도 1조원대 기업이 없다. 나머지는 화이자,GSK 등 다국적 제약사의 몫이다. 더욱 놀라운 건 토종회사들 상당수가 다국적 제약사의 도매상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의 영업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D사,J사 등은 전체 매출의 80% 이상이 글로벌사 약품을 판매하는 데서 나온다.

국내 제약사들의 실적이 좋아질 기미는 없다. 더 나빠질 것이란 예상이 대세다. 정부가 시장형 실거래가 상한제(저가구매 인센티브제),리베이트 쌍벌제 등을 무기로 약가 인하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수익성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제약사 CEO는 "한국 제약산업이 암 판정을 받은 셈"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정부는 암의 위치를 확인해 치료 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환자(제약사)는 진단이 잘못됐다며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미국 화이자,프랑스 사노피-아벤티스,독일 바이엘,스위스 노바티스,일본 다케다제약. 선진국치고 번듯한 제약사가 없는 나라는 없다. 그런데 국운이 융성하는 이즈음 한국엔 글로벌 제약사는커녕 안방을 지킬 수비수조차 없다. 왜 그럴까. 과보호가 국내 제약산업을 '우물안 개구리'로 퇴화시킨 배경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충격을 느끼지 못해 크게 웅비하려는 꿈조차 꾸지 못했다는 얘기다. 반면 지금의 과도한 규제 또한 제약산업엔 약보단 독이 될 것이란 우려가 크다. 기업의욕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규제행정을 펼치는 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제약 · 바이오산업을 관장하면서 국내 제약산업이 성장정체의 덫에 걸린 측면이 있다고 기자는 본다. 이들 부처는 산업육성보다는 문제점을 찾아내는 쪽으로 세팅된 조직이다. 차라리 복지부에서 제약 · 바이오 · 의료기기분야를 떼어내 'HT(Healthcare Technology)산업부'를 신설하는 게 낫다고 본다. 'IT코리아'는 옛 정보통신부가 상당 부분 이끌었다는 평가가 벤치마킹 포인트다.

제약 · 바이오산업은 동시대 과학기술과 상상력이 빚어내는 최고의 하이테크 산업이다. 그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선진국들이 좀체 방심하지 않고 국가역량을 모아 키우는 분야다. '바이오 육성'이라는 노래소리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토종제약사들이 시름시름 앓고 있는 현실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건가. 잘못된 걸 알고도 방치하는 건 무능한 정부다.

남궁 덕 중기과학부장 nkduk@g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