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공연 보고 '필' 꽂혀…직장 그만두고 공연 따라다녀
2005년부터 공식 사진가로
20세기 최고 무용가이자 안무가로 꼽히는 독일의 피나 바우쉬.그녀가 2003년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한 '마주르카 포고'를 보고 30대 초반의 한 남자는 충격에 휩싸였다. 말 한마디 없고 스토리가 연결되는 것 같지도 않은 무용 한 편이 자신의 경험과 속마음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저걸 찍는 거야." 그는 피나 바우쉬의 공연 장면을 사진에 담고 싶어 무작정 이메일을 썼다. "당신의 작품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게 해주세요. "
바우쉬의 공식 사진을 2005년부터 5년간 찍어온 사진작가 우종덕 씨(42)의 이야기다. 거장의 무용 사진을 찍고자 하는 사진작가는 전 세계 수십명에 달했고,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다음 공연이 있다는 일본으로 찾아갔다. 공연을 본 뒤 똑같은 제안을 했지만 바우쉬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서울에 있던 직장도 뒤로한 채 유럽과 미국 공연까지 쫓아다녔다.
뉴욕 공연이 있던 2004년 어느 날 기자단을 대상으로 리허설을 공개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는 공연장에 몰래 들어가 맨 앞줄에 앉았다. 어색해 보이면 금방 쫓겨날 것 같아 수염이 덥수룩하고 나이 지긋해 보이는 옆자리의 사진기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예상대로 불 꺼진 객석에서 자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은 뉴욕타임스 기자였다.
그는 사진들을 갖고 있다가 2005년 바우쉬가 독일 부퍼탈에서 한국을 테마로 한 '러프 컷'을 공연할 때 또 찾아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2년의 기다림과 끈질긴 추적 끝에 그는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카리스마 넘치고 예민하기로 유명했어요. 늘 바빠 보여 말도 잘 못 붙였죠.몇 달 전에 비서에게 그동안 찍은 사진을 앨범처럼 만들어 준 적이 있었는데 공연 때문에 독일에 갔을 때 바우쉬가 저를 보자마자 뛰어와서 두 손을 딱 잡고는 '사진 봤다. 너무 좋았다. 몇 개만 빼고.공연을 보면서 앞으로 많은 걸 이야기하자'고 했어요. 지금도 선명해요. 그 뒤로 제가 찍는 사진들은 대부분 공식 사진으로 채택돼 유럽의 극장 벽면 전체에 걸리기도 하고 자료집이나 포스터로도 많이 쓰였죠."
그는 2005년부터 바우쉬가 암으로 타계한 2009년까지 1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 체류하는 부퍼탈 시립무용단과 함께 다녔다. "1년에 10번 넘게 나간 적도 있어요. 지금도 현지 무용인들은 제 집이 독일에 있는 줄 알아요. 독일 벨기에 영국 프랑스 아시아 지역엔 무조건 다 갔죠.어느 날부터인가 외신 기자나 작가들도 '저긴 미스터 우의 자리'라고 비워놓고 셔터 누를 위치를 잡아요. 동종 업계에서 인정 받았을 때는 정말 기분이 날아갈 것 같더라고요. "
바우쉬는 말기암 진단을 받은 지 5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삶의 지표로 삼았던 우씨에게 그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바우쉬는 안무를 짜는 게 아니라 그냥 무용수들에게 질문을 던지곤 했어요. 무대에서 대부분의 표현은 무용수 개인에게 맡겼죠.한번은 제가 물어봤어요. 이런이런 장면은 무슨 의도냐? 그랬더니 '만들 땐 어떤 의도와 생각이 있었지만 무대 위에 올라가면 그건 중요하지 않다. 모든 건 관객의 몫이다. 네가 느낀 그게 바로 정답이다'고 하더군요. "
그는 지난달 29일부터 오는 31일까지 경기도 과천 갤러리 알레 434에서 바우쉬의 공연 · 리허설 장면 등을 찍은 사진 30여점과 영상을 전시 중이다. "바우쉬는 제 인생의 좌표를 찾아준 친구와 같아요. 유리처럼 깨질 것 같은 피부로 강렬한 열정을 내뿜던 그를 보면서 함께 신이 났죠.앞으로도 무용과 관련한 사진 작업은 계속 할 거예요. 무용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안무도 배워보고 싶습니다. "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