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의 산업정책 읽기] 특허전담재판소가 없는 나라
1980년대 미국이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회심의 카드로 꺼내 든 것은 특허 중시(pro-patent) 정책이었다. 이것이 레토릭이 아니었음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은 1982년 특허소송 항소심의 관할을 집중시킨 연방순회항소법원(CAFC)의 설립이다. 그 전에는 12개 지역별 연방항소법원들이 제각각 특허법을 해석하다보니 판결이 서로 달라 예측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소송 당사자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판단을 내려줄 법정을 찾아다니는 이른바 포럼 쇼핑(forum shopping)도 난무했다. 결과는 특허 무용론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CAFC 설립은 이 모든 문제를 해소하는 전환점이었고, 이후 미국이 정보기술(IT) 등 신산업을 주도하는 데 법적 발판이 됐다는 평가다.

우리도 미국처럼 특허 중시로 가자고 대통령 직속 국가지식재산위원회가 출범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식 산업은 큰 산업이고 모든 분야에서 질적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분야에서 아무리 변화해도 후진적 사법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소용없다. 특허소송을 하는 기업 입장에서 보면 지금의 사법제도는 황당하기 짝이 없다.

1998년 특허분쟁을 빨리 해결하고 판결의 통일성도 기하자고 특허법원을 만들기는 했다. 그러나 특허 유 · 무효 소송만 가능할 뿐 특허침해 소송은 할 수 없게 돼 있다. 반쪽짜리 법원이 되고 만 것이다. 법무부와 법원에서는 특허침해 소송은 민사소송이니 지방법원,고등법원,대법원을 거치라고 주장한다. 그 바람에 기업들은 한쪽에서는 특허 유 · 무효 소송을,다른 쪽에서는 특허침해 소송을 벌여야 한다. 소송기간이 하염없이 길어지고, 심지어 엇갈린 판결까지 나오는 상황이 벌어진다. 특허침해 소송의 경우에도 특허 유 · 무효에 대한 판단이 먼저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한 쪽 법원에서 이겨도 다른 쪽 법원에서는 지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기업들의 몫이다. 특히 중소기업들은 죽을 맛이다. 5년에서 11년까지 장기화되는 소송을 견뎌낼 중소기업은 거의 없다. 소송에서 이겨도 만신창이가 되기 일쑤다. 기술 하나 믿고 특허를 땄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피눈물을 흘리는 중소기업들의 억울한 사례가 속출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동반성장 운운할 게 아니라 홀로 서려다 후진적 사법제도의 희생양이 되고 있는 이런 중소기업들에 먼저 눈을 돌려야 한다.

법무부와 법원은 관할 집중과 신속한 처리는 연관성이 없다고 하지만 일본이 지식재산 고등재판소를 설치한 뒤 소송 처리기간이 짧아진 사실을 확인하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또 관할 집중을 해도 특허법원은 안 된다고 하지만 산업계는 전문성 있는 법원을 원한다. 미국 일본도 그렇고, 영국 프랑스 유럽연합(EU)도 관할 집중과 전문성 확보로 특허침해 소송에 대응하고 있는데도 우리 법무부와 법원만 요지부동이다. 철저히 공급자 중심의 사법제도이고, 조직과 직역 이기주의라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래도 양식 있는 법조인들은 있다. 특허법원장을 지낸 최공웅 안문태 박영무 손용근 김이수 씨,특허법원 판사를 역임한 한동수 최성준 김기영 이장호 씨 등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특허침해 소송 항소심을 특허법원으로 집중하기 위한 법원조직법 개정안(서병수 의원 발의)이 현재 법사위에 계류 중이다. 16대,17대에 이어 자동 폐기될지,아니면 역사적 사건이 일어날지 두고 볼 일이다.

안현실 < 논설위원 / 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