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시장을 뒤흔들고 있는 유럽 재정위기의 불씨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재정위기 전염우려가 이탈리아와 스페인으로 번진 가운데 영국의 한 유명 싱크탱크는 "이탈리아의 디폴트(채무불이행)가 불가피하다"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불안이 커지면서 장클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유럽 경제둔화가 지속될 경우 6개월 이상 '유동성을 공급하는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말해 양적완화 가능성을 시사했다.

ECB는 4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정례 금융통화정책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현행 연 1.50%로 유지키로 결정했다. 트리셰 ECB 총재는 금리동결 결정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스페인과 이탈리아발) 금융시장 불안을 완화하기 위해 특별 유동성을 공급키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ECB가 유로존 은행권이 필요로 하는 만큼 6개월 만기의 유동성을 공급할 것이며 올 연말까지 기존 유동성 공급 조치들을 연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트리셰 총재는 "이번 유동성 공급조치는 지속적인 프로그램"이라고 밝혀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이탈리아와 스페인 국채 매입 가능성을 시사했다. 앞서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대한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 ECB가 18주간의 공백을 깨고 유로존 국채 매집활동을 조만간 재개할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파이낸셜타임스도 "유로존재정안정기금(EFSF)이 재정위기 대응에 한계를 보인 만큼 '돈을 찍을 수 있는' ECB가 문제해결의 전면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럽연합(EU) 정치 지도자들의 위기 확산 방지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독일 경제일간 한델스블라트는 "주제 마누엘 바로수 EU집행위원회 위원장이 공개서한을 통해 유로존 17개국 정상에게 EFSF 확대를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유럽위기의 '뇌관'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움직임도 분주해졌다. 그러나 아직 시장반응은 냉랭한 편이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는 3일 의회 연설에서 "이탈리아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은 견실하다"고 주장했다. 이탈리아 재정위기에 대한 불안을 투기세력과 유럽전반의 문제 탓으로 돌린 것이다. 독일 주간 슈피겔은 "베를루스코니의 연설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싸늘한 시장반응을 전했다. 호세 루이스 사파테로 스페인 총리도 국내 정치권을 향해 오는 26일 긴급 대책회의를 가질 것을 촉구했다.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스페인 정부는 33억1000만유로 규모의 국채발행에 성공했지만,재정위기 재발 우려로 응찰자는 줄고 국채금리는 치솟았다. 2014년 4월만기 국채금리는 연 4.813%로 한 달 전 4.291%에 비해 크게 뛰었다.

한편 BBC방송은 영국의 싱크탱크인 경제경영연구센터(CEBR) 발표를 인용,"(재정위기로) 이탈리아는 죽고,스페인은 간신히 살아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CEBR은 "이탈리아는 스페인에 비해 빚의 규모가 훨씬 크다"며 "이탈리아 경제가 갑작스러운 '도약(big jump)'을 하지 않는 이상 디폴트를 피하기 힘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