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자산시장에 쓰나미가 몰아치고 있다. 미국의 더블딥공포와 유럽 재정위기로 주요국 증시는 4일과 5일 동반 폭락했다. 국제원유 시장도 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감소 우려로 얼어붙었다. 사상 최고가를 연일 경신하던 금값은 돌연 하락세로 돌아섰다. 투자자들은 역설적이게도 "그래도 믿을 건 미국 채권뿐"이라고 외치며 미 국채 시장으로 몰렸다. 외환시장도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스위스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낮추며 스위스프랑 강세에 제동을 걸었다. 자산시장이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의 혼란에 빠지자 글로벌 금융시장의 수장 격인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고민이 깊어졌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인터넷판에서 한 풍자사이트가 만들어낸 기사를 인용해 버냉키 의장이 4일 밤 술에 취한 채 바에 나타나 주변 사람들에게 "경제가 엉망이 됐다"며 45분 동안 괴로움을 토로했다고 보도했다.


◆국제유가 폭락

WTI 6개월 만에 최저치…경기침체 신호

국제유가가 지난 2월 이후 최저 수준으로 폭락했다. 미국과 유럽의 경기가 둔화될 조짐을 보이자 수요가 감소할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된 탓이다.

4일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9월 인도분 가격은 5.30달러(5.8%) 급락한 배럴당 86.63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6개월 만에 최저치로 하루 낙폭으론 지난 5월 이후 가장 크다. 런던 국제선물거래소(ICE)에서 북해산 브렌트유도 5.59달러(4.9%) 추락한 배럴당 107.25달러를 기록했다. 싱가포르 현물시장에서 두바이유는 2.2% 떨어진 배럴당 107.23달러로 마감했다.

가격 급락에 투자자들이 앞다퉈 투매에 나서면서 거래량도 폭증했다. 이날 NYMEX에서 원유는 91만4000계약이 거래돼 최근 1개월 평균보다 52% 급증했다. ICE 역시 69만6000계약으로 47% 늘었다.

유가가 급락하자 당초 강세를 점쳤던 전문가들도 보수적으로 돌아서고 있다. 바클레이즈캐피털은 조만간 전년 대비 세계 원유 수요 증가량을 하루 156만배럴에서 110만배럴로 하향 조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조너선 바랏 커머더티브로킹서비스 이사는 "지금 원자재시장은 패닉 상태"라며 "현 상황에서 투자자들이 현금을 선호하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다.

정성택 기자 naive@hankyung.com


◆금값 돌연하락

증시 급락에 부족한 증거금 메우려 급매도

천정부지로 치솟던 금 시장이 혼란에 빠졌다. 최근 안전자산 선호심리 확산으로 자금이 대거 몰렸지만 증시가 폭락하면서 일부 투자자들이 현금 마련을 위해 차익 실현에 나서자 단기 가격전망이 불투명해졌다.

4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금 12월물 가격은 오전 한때 온스당 1684.90달러까지 치솟으며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기관투자가들이 주식을 던지고 금 시장으로 몰려든 덕분이다. 하지만 오후 들어 가격 상승세가 주춤하더니 온스당 1642.20달러까지 오히려 떨어졌다. 결국 12월물은 0.4% 하락한 1659.0달러로 거래를 마쳤다.

이날 장중 금값이 갈팡질팡한 것은 투자자들이 급히 현금 확보에 나선 탓이란 분석이 유력하다. 금 시장 참여자들은 주식이나 선물,옵션 등에서 잃은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올 들어 4일까지 16.5%나 값이 오른 금을 팔고 차익을 일부 실현했다. 또 다른 이유는 마진콜이었다. 투자자들이 대출을 통해 외환이나 상품 선물거래를 할 때 중개 회사에 일정 비율의 증거금을 내게 되는데,장부 가격이 내리면 중개 회사들은 증거금을 추가로 내도록 요구한다.

프랭크 맥기 인테그레이티드브로커리지서비스 수석딜러는 "투자자들이 '나쁜 것'(주식 등)을 보호하기 위해 '좋은 것'(금)을 팔고 있다"고 설명했다.

강유현 기자 yhkang@hankyung.com


◆美국채값 상승

갈 곳 없는 글로벌 자금, 美 국채로 일단 도피

미국 국채시장에선 이례적인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미 경제가 더블딥(경기회복 후 재침체)에 빠질 우려가 커지고 있는데도 미 국채로 연일 자금이 몰리고 있다. 글로벌 증시 폭락으로 극도로 불안해진 투자자들이 '최후의 보루'로 여겨지는 미 국채로 일단 대피하고 보자는 심리가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4일(현지시간) 뉴욕 채권시장에서 10년물 미 국채금리는 0.22%포인트 급락(가격 상승)한 2.40%로 거래를 마쳤다. 하루 낙폭으로는 지난해 6월 이후 12개월 만에 최대였으며,금리 수준으로는 지난해 10월 이후 가장 낮았다.

통화정책에 민감한 2년 만기 국채금리도 0.08%포인트 하락한 0.26%로 사상 최저치를 경신했다. 30년 만기 국채금리도 0.16%포인트 떨어진 3.74%로 거래를 마쳐 10개월 만에 가장 낮았다.

블룸버그통신은 "위험자산인 주식과 상품 시장에서 원유 가격이 동반 폭락하면서 상대적으로 미 국채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미 국채가 최고 신용등급(AAA)을 잃어도 여전히 선호도는 떨어지지 않을 것으로 분석했다. 짐 오닐 골드만삭스자산운용 회장은 "미국 신용등급이 떨어지면 국채 시장이 일시적으로 타격을 입겠지만 투자자들은 결국 계속 미 국채를 살 것"이라고 말했다.

장성호 기자 jas@hankyung.com


◆외환시장 戰雲

스위스, 2년 만에 금리 인하…일본, 엔화 방출

외환시장에선 총성없는 전쟁이 시작됐다. 칼은 스위스와 일본이 먼저 꺼내 들었다. 스위스 중앙은행은 지난 3일 "스위스프랑 가치가 지나치게 과대 평가돼 스위스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며 기준금리를 0~0.75%에서 0~0.25%로 낮췄다. 스위스의 기준금리 인하는 2009년 3월 이후 처음이다. 시중은행이 중앙은행에서 끌어쓸 수 있는 자금 한도도 300억스위스프랑에서 800억스위스프랑으로 대폭 올리는 양적완화 정책도 내놨다.

곧바로 4일엔 일본 정부가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대거 사들이며 엔고 저지에 나섰다. 일본이 독자적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한 것은 지난해 9월 이후 처음이다. 개입 규모는 8000억~9000억엔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정부는 5일에도 엔화를 방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블룸버그통신은 각국의 시장 개입이 이어지면 지난해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로 촉발된 환율전쟁이 올해 재발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경기 침체에 시달리고 있는 미국이 3차 양적완화에 나설 경우 환율전쟁의 강도는 더 높아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미국의 자금 살포로 달러 약세 현상이 가속화되면 주요 국가들은 자국 통화가치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추가 개입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브라질 등 이머징 시장에서의 저항도 상당할 것으로 전망된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